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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불면인

불면인 #9 . 안개



안개

길 생활이 시작된 이후의 내 소일거리는 단 두 가지였다. 날짜 지난 신문을 읽는 것과 꿈을 기록하는 것. 시간을 죽이기 위해 가끔 무신경하게 의미 없는 낱말들을 적어 내려가거나, 스치듯 마음에 떠오르는 문장들을 낙서하듯 끼적거리곤 했다. 어릴 때부터 무수한 꿈을 꾸었지만 최근의 꿈들은 어릴 때의 꿈과 다르게 선명하고 길었다. 때로는 지진의 꿈처럼 기록하기 힘들 만큼 긴 이야기일 때도 있었다. 그렇기에 꿈이 사라지고 기억이 증발하기 전에 열심히 기록해야했다. 노트를 꿈 이야기로 메워가다 보면 꿈속의 일들이 현실인지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이 꿈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분명한 것은 육신이 추위에 떠는 이곳이 더욱 현실에 가까운 꿈이라는 점이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어차피 하루에도 몇 번씩 두 시공간을 오가며 살아가니까. 노트가 눅눅하다. 차가웠던 노트가 손의 체온을 빌어 따뜻해지기 시작한다. 노트 안에는 여러 사람이 산다. 현실에서 만난 사람. 현실에서는 못 만나지만 꿈에서는 만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오직 꿈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 혹은 두 세상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사람. 낯선 곳, 낯선 바람, 낯선 시간이 살갗을 에워싸는 곳. 때로는 땡볕이고, 때로는 비와 구름이고, 때로는 차가운 아스팔트이고, 때로는 포근한 종이박스 안이기도 한 공간. 사막처럼 말라있지만 때로는 물속처럼 아늑하기도 한 곳. 나는 마치 현실과 꿈을 가르는 강 위에 떠서 유유히 유영을 즐기는 기분으로 창밖을 바라본다. 도시를 적시던 비가 멈추고 안개가 내리기 시작한다. 식은 폐를 관통한 호흡과 전화박스의 유리벽이 만나 서로를 더듬어보지만 둘의 냉랭한 체온은 한 방울의 습기조차 머금지 못한 채 마냥 맑을 뿐이다. 겨울비가 땅 위에 두고 간 습한 기운은 곧 찬 공기에 섞여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작은 얼음덩어리들로 변한다. 집 없는 사람들에게 냉기를 머금은 습기는 재앙이다. 그 재앙 사이로 빨간 우산 하나가 지나간다. 아마도 저 빨간 우산 아래에 있는 사람에겐 집이 있겠지… 따뜻하겠지… 먹을 것도 있겠지… 구경만이라도, 구경만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은 곧 소원이 된다. 지붕이 있는 집. 따스한 방. 데운 음식. 우산의 주인은 노인인지 젊은이인지 아이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다. 내게는 지붕으로도 쓸 수 있을 만큼 큰 우산이다. 거리는 다시 적막에 잠긴다. 주변에 온기를 가진 것이라곤 기름기 없는 내 목구멍뿐이다. 안개와 함께 정적이 내린다. 무거운 정적은 가끔 나를 두렵게 한다. 행여나 나만 남은 것은 아닐까? 혹시 나만 남은 것은 아닐까? 도시는 소음으로 가득 차있을 때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고, 정적에 싸였을 때 정체 모를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는 신기한 장소다. 노트를 접어 넣고 배가 고플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위는 불에 그슬린 스타킹처럼 쪼그라들었지만 아직 괜찮다는 신호를 보낸다. 다행이다. 문득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따뜻한 커피 한 잔과, 깨끗한 종이와, 연필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주 오래 전, 바다를 찾았던 날이 떠오른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마지막으로 탄 버스기사가 알려준 대로 바다가 가장 가까이 있다는 동네에서 내려 서쪽을 향해 걸었다. 그리움이었는지 굶주림이었는지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는 단지 바다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바다는 생각보다 먼 곳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한눈에 보기에도 오랜 세월 자랐을 법한 소나무들로 가득한 숲을 만났다. 소나무들은 한결같이 한 방향으로 가지를 뻗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팔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안개가 서려있었다. 숲속에 들어서자 태양은 은빛으로 색을 바꾸었다. 가느다란 물방울들이 볼과 살갗 위를 시원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이 숲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안개에 잠겨 있었을까. 안개는 마치 몇 백 년이라도 이 숲에 갇혀있었다는 듯이 나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이런 숲이라면 며칠이라도 쉬지 않고 산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사박사박 솔잎 소리가 경쾌했다. 껍질이 벗겨져 자줏빛 속살을 드러낸 해송들도 많았다. 나무도 늙어간다. 숲은 깊었다. 한참을 걸었지만 쉽게 끝을 보이지 않았다. 지루하지 않은 나무와 안개의 풍경이 계속됐다. 가녀린 안개의 포말이 연신 볼을 쓰다듬었다. 얼마쯤 걸었는지 가늠하기 힘들 즈음에 바람에서 소금기가 느껴졌다. 아, 드디어 바다인가. 50미터쯤 더 걷고 나자 긴 해송 숲이 끝나고 눈앞에 구름 같은 안개가 펼쳐졌다. 발 아래로 자갈이 밟혔다. 검은 빛깔을 가진 자갈이었다. 안개 속에서 파도 우는 소리가 들렸다. 숲속보다 거센 바람이 불었다. 나는 바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마 걷지 않아 파도에 닿았다. 안개 속의 공명 탓일까. 파도는 생각보다 잔잔했다. 나는 파도가 보이는 자갈 위에 앉아 파도가 드나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보다. 파도소리만으로도 가슴이 시원해졌다. 파도는 끝나지 않는 기나긴 변주를 들려주었다. 때로는 스타카토로, 때론 아다지오로, 결국은 라르고로. 아무리 오래 듣고 있어도 새로운 연주를 듣는 듯 낯선 기분이었다.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안개가 걷힌 후에도 태양의 열기는 나약했다. 늦은 오후까지 바다를 잠식하는 해무라니… 선명하게 보이는 파도의 몸집은 안개 속에서 보던 것보다 오히려 작고, 연약했다. 파도에 닿아있는 몽돌은 검푸른 색으로 빛났다. 태양의 색이 짙어지면서 노을을 예고하고 있었다. 안개와, 바다와, 나약한 파도와 노을.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바다였다. 갈매기들도 비행을 멈추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바다가 투명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해변에 나 혼자가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해무 속, 시선이 닿는 곳에 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치마로 무릎을 감싼 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치마는 버드나무 잎처럼 작은 바람에도 살랑살랑 흔들렸다. 청록색 두건 옆으로 새카만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바다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발목이 잠기자 잠깐 멈춰 서더니 내가 앉아있는 곳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작은 물방울들이 솟아올랐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끝나지 않는 해변을 끝까지 걸으려는 사람처럼 느리고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뒷모습이 조금씩 붉게 물들었다. 해무 위로 찬란하게 번지는 그날의 노을은 진정 장관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의 안개는 아직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점점 더 자욱해진다. 나는 그날, 안개 낀 바다에서 보았던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누구인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나이가 몇인지도 모르는 그녀에게. 뭐라고 써야 할까? 그날이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신이 안개 낀 바닷가에 앉아있던 그날 당신을 보았다고. 나도 그 바다를 보고 있었다고. 당신의 느린 걸음을 기억한다고. 나는 바다가 그리웠다고. 당신이 왜 바다에 왔는지, 왜 오래 그곳에 있었는지 궁금했다고. 그러나 모르는 사람에게는 편지를 보낼 수 없다. 보낸다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그 사람의 손에 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편지를 써볼까. 옆모습밖에 기억나지 않는 그날의 그녀에게?


다행히 안개가 걷혀서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단지 옆모습일 뿐이었지만. 물론 그 옆모습조차 머리에 가려져 있었지만.

어쩌면 제가 기억하는 당신의 옆모습은

그날 그 순간에만 볼 수 있었던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지루하지 않은 평화로움으로 가득 찬 얼굴.

혼자였지만 외로워 보이지 않는 얼굴.

안개 속에서 고요했던 바다처럼 당신도 참 편안해 보였습니다.

안개 걷힌 바다를 걷던 당신의 뒤를 따라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노을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평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그랬듯이 어쩌면 당신에게도,

그날의 바다는 삶에서 드물게 만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순간이었을 테니까요.

저는 자주 바다를 찾는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어부도 아니고 어촌사람도 아니어서

어쩌면 제 평생에 바다를 보는 시간은 모두 모아도 일주일이 채 안 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차가운 도시에 새파랗게 질려버릴 즈음이 되어야 드물게 바다를 찾습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그날은 바다보다 안개가 유난히 더 반가웠습니다.

투명한 대기가 늘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파도가 그렇게 다양한 소리를 낸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아, 당신의 옆모습 말고도 또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뒷모습.

파도의 연주에 맞춰 춤추듯 느리게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기억합니다.

당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날의 바다는 제게 조금 덜 완벽했을지도 모릅니다.

늦은 고백입니다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도시로 돌아온 후에도 가끔 그날이 떠오르면,

당신처럼 느린 걸음으로 아스팔트 위를 걷곤 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맨발로 걷기도 했지요.

맨발에 닿는 물의 느낌이 좋았습니다.

당신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날의 바다와 안개와 파도를 추억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같은 순간이라는 건 다시는 오지 않으니까요.

저는 그날의 바다와 그날의 당신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전해지지 않을 편지로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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