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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31 . 긴 골목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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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잦아들고 나니 빗방울 사이로 산들바람 같은 것이 불어온다. 오래 햇볕을 받지 못한 창백한 뺨을 스치고, 희멀건 손을 감싸고 지나는 선선함은 분명 산들바람의 것이다. 폭풍우가 부는 와중에도 이런 바람이 불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폭풍우 한가운데에 이렇게 부드럽고 포근한 바람이라니…. 어쩌면 폭풍우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나는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책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축축했던 외투가 꽤 마른 모양이다.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든다. 나는 오는 길에 만났던 꽃집을 쳐다보며 짧은 고민을 한다. 노파가 일했다던 꽃집이다. 들러볼까, 아니면 그냥 지나칠까. 산책은 언제든 나올 수 있으니 꼭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그곳을 향해 걷고 있다. 이제 꽃집은 이 도시뿐만 아니라 전국을 상대로 꽃을 팔 만큼 거대해졌지만 여전히 소박한, 아니, 투박한 외관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작은 규모로 꾸며진 첫 번째 온실의 현관문을 밀고 들어간다. 문을 여는 순간, 싱그러운 생명의 향기와 여린 흙냄새가 나를 반긴다. 나는 화원 안을 둘러본다. 서너 명의 사람들이 꽃을 돌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얼핏 보기에도 꽃과 나무를 대하는 그들의 눈길에서 애정이 느껴진다. 아무도 내가 들어온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일부러 인기척을 내지 않고 천천히 화원을 구경한다. 두엇의 여자들과 두엇의 남자들이 일하고 있다. 여자들은 나일론처럼 가느다랗고 길게 자란 머리칼을 질끈 묶고 있다. 팔뚝은 질기고 단단해 보인다. 왜소한 체구지만 전혀 약해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가꾼 꽃과 나무들은 화원 이곳저곳에 잘 정돈되어있다. 그것을 보는 내 마음 속에서는 이런 아름다움을 사람의 손으로 가꿀 수 있다면 청춘을 소비하는 일이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파의 마음도 그랬을까? 어쩌면 그것보다 더 벅찬 울림이었을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나무와 꽃들, 거대한 녹음, 푸른 잎사귀… 무엇 하나 노파의 영혼을 흔들지 않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사막의 모래처럼 버석거리던 영혼의 벽 앞에 선 자연과 생명이 거친 상처투성이인 영혼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그러한 순서를 거쳐 노파는 모래사막에서 꽃과 녹색의 화원으로 터전을 옮긴 것이다. 화원을 구경하는 동안 나는 노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화원이라면 당연히 주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화원의 둥근 천장을 보고 있으면 마치 아치형의 교각 아래에 서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다. 발밑으로는 강이 흐르고 다리 위에서는 사람들이 여유로운 모습으로 흐르는 강을 내려다본다. 강의 주변은 각종 나무들과 다양한 꽃으로 만발하다. 겨우 작은 다리 주변의 풍경일 뿐인데도 이곳이 이미 천국이다. 발걸음을 옮기다가 꽃을 돌보는 여자 하나와 눈이 마주친다.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여자가 먼저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한다. 그녀의 얼굴 역시 꽃을 닮아있다. 그녀의 얼굴은 소박하고 차분한 색을 가진 꽃이다. 자신을 돌보는 이마저 꽃으로 바꾸어버리는 자연의 힘은 실로 놀랍다. 노파 역시 순수한 자연과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되어갔을 것이다. 그 이전부터 이미 가장 자연에 가까운 영혼이었던 바로 그 사람이 말이다. 화원 안의 사람들 중 내게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편안하게 화원을 둘러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화원을 두 번이나 돌았는데도 전혀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꽃과 나무들은 시선의 각도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작은 화원이 이 정도라면 큰 규모의 온실은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의 꽃구경은 이쯤에서 마치기로 한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먼 길을 걸어야 하기도 하고, 몸이 이미 허기에 무너져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꽃집에 들르기를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한다. 노파에게 꽃집의 안부를 전해줘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대로변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골목의 이정표는 작은 레스토랑이다. 레스토랑의 이름은 ‘고래’로서 말 그대로 고래 고기 전문점이다. 간판에는 흰 바탕에 검은색 고래가 그려져 있는데 ‘고래’라는 글씨는 쓰여 있지 않다. 고래 그림이 간판의 전부이기 때문에 고래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나는 태어나서 이 집에서 고래 고기를 두 번째로 먹어봤는데 맛이 나쁘지 않다. 고래 집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일단 미로의 출발점을 떠난 것이다. 일단은 이 골목을 끝까지 걸어야 하는데 끝에 닿기 전에 좌우로 서너 개의 골목을 지나야 한다. 그 중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도 집으로 가는 길과 연결되지 않는다. 이 골목의 마지막까지 걷다가 끝에서 두 번째 골목에서 우측으로 꺾어 들어간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미로가 시작된다. 이 골목에는 다양한 형태의 주택이 있다. 예스러운 집도 있고, 새로 지은 깔끔한 시멘트 집도 있다. 집의 형태가 다르면 다음 골목을 찾기가 쉽다. 이 골목에서는 우측의 새로 지은 콘크리트 건물 맞은편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가면 된다. 콘크리트 건물을 등 뒤에 두고 걷다보면 왼쪽으로 아주 오래된 집이 하나 나오고 작은 깃발이 걸려있는데, 이 집은 점집이다. 미래를 봐준다거나 하는 집은 아니고, 집 안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정도의 점을 봐주는 집이라고 선장이 이야기해주었다. 골목의 옛집들에는 대부분 노인들이 살기 때문에 생각보다 점집이 잘 된다는 이야기도 했다. 점집을 지나면서부터는 골목을 세어야 한다. 왼쪽으로 난 골목은 무시하고, 오른쪽으로 난 골목을 하나, 둘, 셋, 네 개 지나서 다섯 번째 골목으로 들어간다. 이 골목부터는 새로 지은 집들이 하나도 없다. 벽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아마도 안방쯤 되는 공간의 벽이 다음 집과의 담의 구실을 할 것이다. 골목들은 여전히 사방팔방으로 나있다. 이 골목부터가 난제다. 이곳은 집들마다 약간씩 다른 톤의 벽돌을 썼는데, 붉은색도 있고, 갈색도 있고, 짙은 붉은색, 베이지색, 살색에 가까운 연한 노란색 등이 있다. 그 중에 흰 벽돌집 정도가 기준이 되어주면 좋겠지만 그렇게 다행스런 일은 전혀 없고, 단지 벽들의 그러데이션이 반복될 뿐이다. 연한 색에서 짙어지는 쪽의 그러데이션이 네 패턴쯤 지난 후에 나오는 왼쪽 골목이 내가 들어가야 하는 골목이다. 이쯤 되면 이제 내가 대로 뒤편 어디쯤에 서있는지 감을 잡을 수 없게 된다. 동서남북도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데이션 골목의 다음 골목도 역시 그러데이션 골목이다. 그러나 이번 골목의 이정표는 조금 선명하다. 이 골목도 꽤 오래 걸어야 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골목 위로 얼기설기 엮여있는 전선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전선은 그야말로 중구난방이다. 전선이 이어진 모양새를 잘 보면 이 골목의 집들이 얼마나 규칙이나 순서 없이 지어졌는지 알 수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면 정확하게 X자 모양으로 교차되는 전선을 만나게 된다. X자를 하늘에 두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살짝 구부러지는 골목이 보인다. 이 골목은 휘어져있기 때문에 골목의 끝이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바로 다음 골목을 찾는 이정표가 된다. 이 골목을 걸을 때는 자주 뒤를 돌아봐줘야 한다. 두 집 건너 하나씩 새로운 골목이 나오지만 그런 것은 모두 무시하고 자주 뒤를 돌아보며 걷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뒤를 돌아보다가 골목으로 들어오는 초입이 커브에 가려 보이지 않는 지점에서 만나는 왼쪽 골목으로 들어간다. 이 골목에는 총 일곱 개의 전신주가 있는데 다섯 번째 전신주 다음에 나오는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된다. 지금 만난 골목부터는 벽에 그려진 낙서들을 감상하며 걷는다. 분필이나 매직으로 그려진 것이 대부분인데 세월에 흐려진 것들도 있고, 최근에 새로 그려진 것들도 있다. 50미터쯤 걸었다고 생각되면 긴장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벽 위의 낙서가 아니라 집들의 대문 기둥을 봐야 한다. 대문 기둥의 어른 허리 높이 정도에 엄지손톱만한 크기로 B라고 음각이 새겨진 집을 찾으면 된다. B라는 집을 찾으면 그때부터 왼쪽으로 난 골목을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번째 골목이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여섯 번째 골목으로 들어간다. 이 골목 역시 휘어져있다. 그러나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는 골목을 찾아내지 못한다. 이 골목은 그냥 끝까지 걷는다. 그리고 돌아 나오면서 오른쪽 골목을 센다. 네 번째 골목이다. 이 골목에서는 그냥 천천히 걸으며 골목 하나가 모두 똑같은 구조의 집뿐인 곳을 찾으면 된다. 골목을 찾으면 그 골목의 끝, 마지막 집. 그렇다.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나무 대문의 끼이이익 소리가 너무 반갑다. 작은 마당의 거친 돌멩이들이 너무 예뻐 보인다. 노파와 선장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로 보인다. 그렇다. 나는 이제 집에 도착한 것이다. 외투도 축축하고, 부츠도 축축하다. 노파가 환한 얼굴로 나를 반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