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33 . 생애 최초의 어머니

*

나는 노파와 선장에게 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디에서 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언제 돌아갈 것인지, 가족은 있는지… 다행히도 두 사람은 나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은, 내가 식사 때마다 깨끗이 그릇을 비운다는 것과 사막에 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어떻게 이야기해야할지 잘 모른다.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존재일까. 설명될 수 있는 존재일까. 나의 지금을 얘기하면 조금 설명이 될까. 나의 과거를 이야기하면 조금 설명이 될까. 나의 소원, 다가올 시간에 대한 소원을 얘기하면 나에 대한 설명이 될까. 나는 나를 어떻게 이야기해야할지 잘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굳이 설명해야한다면 나는 한 여자의 자궁에서 태어난 남자아이이다. 나는 나를 낳아준 여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나는 내가 몇 살부터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에게 친절했던 몇몇 사람의 인상과 음성은 기억한다. 그들은 대부분 통통하거나 뚱뚱한 여자들이었고, 따뜻하고 차분한 톤의 음성을 가졌으며, 발음이 정확했다. 그들은 대부분 친절했는데 나에게뿐만 아니라 내 동료라 할 수 있는 모두에게 동등하게 친절했다. 내가 나이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더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느낌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나는 오히려 내가 나이기 때문에 특별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동료들과 나는 친절한 그들의 말을 잘 따르는 편이었다고 기억한다. 우리는 함께 지내는 데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씻으라면 씻었고, 먹으라면 먹었고, 자라면 잠들었고, 일어나라면 일어났다. 나는 동료들과 그리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의사를 소통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대화를 위해 입술과 혀보다는 손과 몸과 표정을 더 많이 이용했다. 그 안에서도 시간은 흘러갔다. 꽤 많은 동료들이 어디론가 떠났고, 꽤 많은 동료들이 채워졌다. 우리는 떠난 이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고, 그들의 거취를 친절한 여자들에게 물어보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떠나는 이들의 부재를 슬퍼하지 않았고, 새로운 이들을 애써 반기지도 않았다. 사는데 불편함이 없다는 조건하에서 우리에게는 별 불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절한 사람들이 나를 단단하고 큰 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곳은 우리들 사이에서는 성역으로 분류되는 곳이었고, 그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동료들 곁을 떠날 거라는 걸 의미했다. 나는 그곳에서 내가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아름답다고 느낀 여자를 만났다. 여자의 몸은 가늘었고, 눈동자는 맑고 깊었다. 오래 보고 있으면 동공의 파동 안으로 빨려 들어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바닥으로 가라앉아버릴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여자의 옆에는 나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여자 동료가 앉아있었다. 나를 자세히 뜯어보던 여자 동료는 아름다운 여자의 귀에 대고 무어라 이야기했는데 내 귀에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단단하고 큰 문을 나와 다시 동료들 사이로 섞여들었고 그 이후로는 그저 평소와 같은 일상이 지나갔을 뿐이다. 그날 밤, 나는 잠들기 전에 긴 공상에 빠졌다.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새로운 동료들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떠난 동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 역시 떠난 이들처럼 이곳을 떠나게 될까. 떠난다면 어디로 가게 될까… 여러 가지 질문 중에서 나를 가장 궁금하게 했던 질문은,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였다. 내가 눈을 뜨고 세상을 알아보던 무렵부터 나는 이미 이곳에 있었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알아보기 이전에도 이미 이곳의 일원이었을지 모른다는 의미이다. 나는… 그래서 나는…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새로운 동료들을 보면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부터 이곳으로 보내진다. 그들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나 역시 그들과 같았다면, 이곳 이전에 나도 어딘가에 있었다는 의미이고,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한다. 공상이 깊어질수록 마음이 답답했다. 공상만으로는 어떤 답도 얻어낼 수 없었다. 내 기억의 시공간에 갇혀 그 안에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에도 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해답 없는 공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는 단단하고 큰 문의 기억과 아름다운 여자의 일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그렇다. 나는 그날 오후를 잊지 못한다. 나는 평소와 같이 동료들과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한창 의논 중이었다. 집을 짓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붕을 올리기 전에 우리는 집의 받침과 기둥이 지붕의 하중을 견뎌낼 것인가를 고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친절한 여자 두 명이 나를 데리러 왔고, 나는 다시 단단하고 큰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전보다 더 화사한 옷차림이었고, 당연히 더 아름다워 보였다. 아름다운 여자 옆에 앉은 여자 동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자 동료가 신고 온 핑크색 에나멜 구두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핑크색 원피스와, 하얀 스타킹과, 반짝이는 에나멜 구두. 여자 동료의 패션 코디는 완벽했다. 그들의 미모에 넋이 나가 반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친절한 여자들 중 한 명의 목소리가 먼 산에서 울리는 고라니의 울음소리처럼 불쾌하게 귓속을 간질였다.

“자, 이 분이 너의 어머니 되실 분이야. 인사드리렴.”

어머니… 나는 그때 어.머.니.라는 발음의 낱말을 처음 들었다. 어.머.니.라…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내 앞에 앉은 아름다운 여자가 내 어머니라면, 어머니라는 것은 아름다운 여자라는 의미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가슴이 벅차게 뛰었다. 이 아름다운 여자가 나에게 무언가가 되어주려고 한다. 그래, 어머니가 되어주려 한다. 이 아름다운 여자가 말이다. 여자 동료도 뭔가를 알고 있는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너무 기뻐서 마구 날뛰고 싶었지만 아름다운 여자 어머니 앞에서 방정을 떠는 것은 나에게 별로 유익한 일이 아닐 거라 판단하고 짐짓 차분한 척하며 남은 코코아를 마저 마신 후 크고 단단한 문 밖으로 나왔다. 내게는 동료들을 만나 이별인사를 할 짧은 시간이 주어졌고, 나는 어머니가 생긴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지를 동료들에게 친절히 설명해줄 겨를도 없이 동료들과의 번개 같은 작별을 마치고 내 아름다운 여자, 내 어머니의 차에 올랐다. 그날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친절한 여자들과 동료들을 떠올려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