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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신의 땅이었을까.


태고를 살았던 선인들은 대지를 신으로 섬기지 않았다. 초록의 산 또한 신적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산과 대지는 그들 자신이었고, 그들의 살이었고, 그들의 삶이었다. 대지는 인간들을 돌보았다. 인간들은 대지를 뜨겁게 사랑했고, 고마워했다. 초록의 산 위로 불붙은 별이 떨어져 산이 가루가 되고 대지가 불바다가 되었을 때도 인간들은 그들을 돌봐주었던 땅에 등을 돌리지 않았다. 아무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고, 아무도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늘 살아왔던 대로 대지 위에 살며 대지를 사랑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녹음으로 우거졌던 산이 가루가 되고, 푸르던 대지가 한 줌 모래로 변해버린 것뿐이었다. 풍요의 대지가 두 번째 세월을 시작하고 있었다.


바다의 딸은 크게 호흡을 내쉬었다가 들이마셨다. 두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렸다.


찬란하던 대지의 풍요는 깨진 별의 조각들과, 별이 뿜어낸 불과 함께 사라졌다. 대지 위의 불이 사그라지면서 사람들의 눈동자에서도 빛이 사라졌다. 시간은 정지한 듯 한없이 흘렀다. 살아남은 자들은 멍한 눈동자로 어딘지 모를 곳을 응시했다. 얼마나 많은 태양이 뜨고 졌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시야가 허락하는 세상 모든 곳을 바라보았고, 그들의 눈이 닿는 곳에는 누런 모래. 그렇다. 누런 모래. 오직 누런 모래. 모래만이 가득했다. 신의 진노… 아닐 것이다. 죄악에 대한 형벌… 아닐 것이다. 시기… 악마의 시기… 시기? 살아남은 자들은 모든 의문과 가능성에 대한 사유를 먼 미래에 동여매두었다. 그들은 당장 눈앞에 닥친 오늘을 살아내야 했다. 불타는 별의 힘은 무자비했다. 거둬들일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모래사막 한가운데에, 박살난 초록의 산이 남기고 간 바윗덩어리들만이 남겨진 전부일 뿐이었다. 사막의 영혼들은 강해져야했다. 황폐한 대지의 흙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부스러지는 마음을 다스려야했다. 풍요의 기억은 이제 전설이 되었다. 새로운 생존의 날들을 위해 싸워야했다. 그들 자신은 신이 아니었지만 신에 가까운 인내심을 발휘해야했다. 스스로 존재해야만했다. 그들은 그들이 살아온 방식 그대로 자연이 주는 것만을 의지해 생존하는 것으로 새로운 땅 위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곡식과, 과일과, 짐승의 고기 따위는 이제 없었다. 자연이 주는 것은 오직 이슬과 비뿐. 땅의 결실이 없었으므로 하늘이 주는 것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어느덧 삶의 전부가 되었다. 바람의 흐름과 구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 구름이 모이고, 흩어지고, 다시 모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 지평선 끝자락쯤 비가 내릴 만큼의 구름이 모이면 사람들은 구름을 쫓아 힘겹게 모래 위를 걸었다. 생명의 힘이 사라진 땅은 날선 칼끝 같았다. 빛과 바람과 비, 지난 계절까지도 대지의 풍요를 도왔던 반가운 조력자들이 이제는 피해야 할 잔인한 얼굴로 바뀌었다. 부족함 없던 일상은 구도자의 길로 변모했다. 빛을 피해, 바람을 피해, 비를 피해 자리를 옮겨가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명상뿐이었다. 그들은 애써 풍요의 시대를 기억에서 지워나갔다. 마치 날 때부터 사막의 사람이었던 듯, ‘우리는 사막에서 태어났다’고 스스로를 가르쳤다. 풍요의 땅은 주어진 대로 살면 되는 선물이었지만, 사막은 이해하고 끌어안아야하는 거친 어린아이였다.


정확히 아침 해가 뜨고 한 시간쯤 지나고 나면 사위가 안개에 갇혔다. 두어 시간이 지나면 무겁게 깔린 안개 위로 비가 내렸다. 비는 태양이 떠있는 내내 멈추지 않았다. 비는 정확히 해거름과 함께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고, 사막의 사람들은 매일 석양에 물든 솜털구름을 볼 수 있었다. 밤에는 비 대신에 별빛이 쏟아졌다. 대양에 가까운 크기의 호수를 가진 그곳의 하루는 칼로 자른 듯 매일 그렇게 선명하고 투명하게 흘러갔다. 호수는 사막의 사람들에게 마실 물을 주었다. 물은 꿀처럼 달았다. 사람들은 호수를 초록의 산만큼이나 아꼈다. 마실 물을 주는 샘이므로 몸을 씻거나 빨래를 하는 것으로 호수를 오염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파괴된 대지는 갈라진 사막들에게 모든 것을 주지는 않았다. 대신 모래사막에는 바위그늘과 소금을 주었고, 초원의 사막에는 물과 나무를 주었다. 초원의 풀은 작게 자랐지만 뿌리는 하나의 줄기에서 다음 줄기로, 또 그 다음 줄기로 이어져 한없이 길게 자랐다. 사람들은 풀뿌리로 많은 것을 만들어냈다. 바구니와, 모자와, 손이 많이 가기는 하지만 가끔 옷을 만들기도 했고, 물고기 사냥을 위해 그물을 짓기도 했다. 초원의 사막은 풍요의 대지가 남긴 마지막 풍요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었다. 초원의 사막은 또한 시와 시인들의 사막이기도 했다. 많은 시인들이 있었고, 바람이나 비의 언어를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호수의 노래와, 잔잔한 바람과, 가느다란 비와, 매일 밤마다 쏟아지는 별들이 사막의 사람들을 시인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시는 나무와 풀들을 더욱 싱그럽게 만들었다. 시를 즐기는 것은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나무를 집삼아 드나드는 새들과 사막의 사람들이 키우는 짐승들도 시를 좋아했다. 시를 들은 새들은 더 높은 소리로 노래했고, 네 발 달린 짐승들은 편안한 꿈을 꾸었다. 호숫가의 여자들이 시를 읊기 시작하면 바람소리가 운율을 맞추고, 호수의 파동이 춤을 추었다. 바람과 비의 언어를 해석하는 사람들 주위에는 늘 어린아이와 노인들이 복작였다. 살아 움직이는 자연의 소리가 가진 의미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무척 근사한 일이었다. 바람의 길고 짧은 여행에 관한 이야기와, 대양을 건너온 물방울들의 이야기는 신비로웠다. 그들은 초원의 사막 안에서 유일하게 사막 바깥세상을 보고 그곳의 풍경을 언어로 그려주는 친절한 여행자들이었다. 그들의 세계는 느리게 흐른다고 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이 별의 회전만큼이나 느려서 무엇을 보든 보고 싶은 만큼 넉넉히 볼 수 있고, 오래 기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의 언어는 느리고, 진지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사람들은 나무 아래에 모여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비의 언어를 해석하는 사람의 말을 경청했다. 그들은 느릿느릿 전해지는 비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지의 세계를 상상했다. 그 중에는 더러 상상하기 힘든 물체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예를 들면, 수백 명이 동시에 타는 배에 대한 이야기나 초원의 사막에서 가장 큰 나무만한 커다란 짐승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다. 비는 자신이 아직 비가 되어 대지 위로 떨어지기 전에, 즉 구름의 모습으로 대기를 유영하며 내려다보는 세상이 얼마나 근사한지를 이야기했다. 온갖 자연과 사람들이 만들어낸 색의 조화를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비 내리는 긴 오후의 어느 찰나에, 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아이들의 머리를 바람이 쓰다듬고 지나갔다. 바람은 가끔 호숫가의 맑은 향기를 몰고 와서 나무 아래에 앉은 사람들에게 선물하고는 했다. 초원의 사막에서는 자연이 가진 모든 얼굴들이 온순하고, 인자하고, 선했다.


바람사막 족장의 이름은 ‘손으로 일하는 자’였다. 금발의 이방인이 바람사막에 들어와 정착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족장은 이방인에게 족장의 자리를 넘기고 은퇴했다. 바람사막에서의 은퇴라는 것은 동굴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 금식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바람을 따르는 자들의 부족이 생긴 후로 이방인에게 족장자리를 내준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어쨌든 금발의 이방인 역시 부족의 역대 족장들처럼 손으로 일하는 자였다. 이방인은 큰 대지에서 왔다고 했다. 어마어마하게 큰 대지… 그는 그곳에서도 사막에서 살았고, 사막에 관한 글을 쓰며 지냈다고 했다. 족장이 되면 이 사막을 떠날 수 없다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꺼이 족장의 자리를 떠맡았다. 바람사막이 그의 마지막 사막이 될 터였다. 바람사막은 초록의 산이 파괴되던 날, 계곡이 날아가 땅 위에 박힌 자리였다. 깊고 구불구불한 마른 계곡사이로 들이치는 바람은 계곡을 따라 흐르며 거대한 광풍으로 돌변했다. 아무리 가늘고 순한 바람이라도 바람사막의 계곡으로 들어서는 순간, 포악한 재앙이 되었다. 바람은 머리와 등과 꼬리를 비틀며 계곡 사이를 날았고, 계곡이 틀어지면서 바람의 관절이 꺾일 때마다 힘을 더해갔다. 계곡을 완전히 관통해서 계곡의 다른 끝에 닿을 무렵이 되면 사람도 날릴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육중해졌다. 계곡의 앞과 뒤로는 ‘바람을 지키는 자’들이 경비를 서며 마른 나무토막을 두드려 계곡 안의 사람들에게 바람의 시작을 알렸다. 바람을 지키는 자들의 연주가 시작되면 계곡에 있던 사람들은 서둘러 동굴 안으로 피신했다. 바람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나무 등걸 뒤에 숨거나 계곡 바닥에 엎드렸다. 동굴은 유일하게 바람으로부터 안전했다. 동굴 앞을 지나는 바람은 동굴 안으로 들어오며 미풍으로 변했다. 물의 근원을 잃은 바람사막의 계곡은 고사목으로 가득했다. 비가 내리고 안개가 피어오르면 계곡은 유령의 숲처럼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것은 초대받은 사람조차도 등을 돌리게 할 만큼 무거운 음침함이었다. 바람사막의 사람들에게 비가 내리는 날은 명상의 날이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빗방울과 흙이 부딪치는 소리만 살아있는 풍경은 사람들의 마음을 경건하게 만들었다. 비 내리는 날의 명상을 주재하는 것은 족장의 몫이었다. 금발의 족장은 명상의 시간동안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상상하게 했다. 그는 거대한 돌덩어리로 지어진 높고 네모난 성과, 손잡이를 돌리면 물이 나오는 신비의 샘과, 일 년 내내 음식을 차게 보관할 수 있는 냉동상자와, 그 모든 풍요와 편안함 안에 사는 사람들을 이야기했다.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긴 해변과 거칠게 파도치는 바다와 수평선을 떠올리게 했다. 수평선 위로 떠올라서 하늘에 잠시 머물렀다가 수평선 너머로 잠기는 태양을 상상하게 했다. 그가 주재하는 명상의 마지막은 늘 자연의 한 장면으로 끝났다. 부족 명상을 마친 후에는 개인 명상시간이 이어졌다. 바람사막의 영혼들은 금발의 족장이 이끌었던 어떤 장면들로 다시 돌아갔다. 상상 속에 그렸던 해변으로 돌아가 백사장 위를 달리거나, 바닷가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금발의 족장은 예전에는 꿈꾸지 못했던 많은 아름다운 세상으로 영혼들을 이끌었다. 사람들은 족장과 함께 온 세상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머나먼 영혼의 여행을 떠났고, 그 여정 안에서 행복을 느꼈다. 이 모든 여행이 비와 대지가 만나는 날에 이루어졌다. 바람사막의 사람들은 명상 중에 여러 색의 바깥세상과 먼 나라를 여행했지만, 그 누구도 낯선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에 나가려고 하거나 세상에 닿을 방법을 찾지 않았다. 인간세상의 모든 곳이 그렇듯이 바람의 사막에서도 죽음은 슬픈 일이었다. 족장은 부족 사람들 중에서 가장 건강한 젊은이들을 선택해 ‘바람을 지키는 자’들로 임명했는데, 그 중에서 바람을 지키는 자가 되기에는 너무 약하고 어린 청년이 하나 있었다. 족장은 당연히 그 청년에게 동굴 안에 있기를 명했지만 이제 갓 아이의 티를 벗은 마른 부지깽이 같은 그 청년은 자신의 열정을 누르지 못하고 바람을 지키는 일을 시작했다. 계곡의 바람은 어느 쪽에서 시작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바람이 시작되는 쪽에서 보내는 경고의 소리는 계곡 중앙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피신의 신호를 알릴 수 있었지만 바람이 빠져나가는 반대쪽 계곡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닿을 수 없었다. 바람을 지키는 일의 위험은 거기에 있었다. 언제 몰아칠지 모를 광풍에 대비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바람을 피할 수 있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바람은, 열정으로 이겨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어린 청년은 서너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처음 바람이 자신의 등을 할퀴며 지나간 순간을 그는 뚜렷하게 기억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옥에서 온 사신의 차갑고 날카로운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찰나에 그의 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입을 벌리고 삼킬 생명을 찾아 계곡의 끝을 향해 무섭게 날아오고는 했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날아와 어깨에 박힌 적도 있었다. 그의 치료를 맡은 사막의 원로는 나뭇가지가 쇄골을 거의 뚫을 뻔했다며 그에게 운이 좋았다고 이야기했다. 쇄골이 회복되는 데는 한 달이 넘게 걸렸고, 그는 회복의 조짐이 보이자마자 다시 바람을 지키기 위해 계곡의 끝으로 나갔다. 바람을 지키는 자들은 나름대로의 생존법을 가지고 있었다. 큰 나무 등걸 뒤에 숨는다든지, 웅덩이를 파고 그 안에 엎드린다든지, 계곡 틈 사이에 몸을 숨기는 등의 방법이었다. 청년은 자신의 몸을 지켜줄 큰 나무를 찾았다. 나무는 넉넉히 크고 두꺼워보였다. 반대편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보통 적게는 하루에 한두 번, 많게는 열 번이 넘었다. 바람의 무게도 경우에 따라 달랐다. 계곡 입구로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거센 바람일 땐 반대편 끝에서는 태풍의 세기를 방불케 했다. 그날도 이미 서너 번의 광풍이 지나간 뒤였다. 오후 끝자락의 광풍 이후로, 사람들은 오늘의 큰 바람은 이제 끝일 거라 생각하며 안도했다. 그때, 반대편 계곡을 지키는 자들이 미친 듯이 나무 몽둥이를 두들겼다.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바람덩어리가 계곡의 입구를 타고 깊숙이 흘러들어왔다. 청년은 잠깐의 휴식 동안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굵고 무거운 몽둥이를 두드리느라 손바닥 여기저기에 물집이 잡혀있었다. 굳은살이 박인 자리도 많았지만 아직 제대로 단련된 손은 아니었다. 집채만 한 바람이 계곡의 구비를 타고 돌면서 덩치를 불려가고 있었다. 바람이 계곡의 모서리를 들이받을 때마다 쿵, 쿵, 소리를 내며 지진처럼 땅이 울렸다. 바람은 계곡 바닥에 떨어진 돌과 나뭇가지들을 샅샅이 긁어모아 바람의 속살을 채웠다. 바람이 동굴 앞을 지날 때 사람들은 거대한 짐승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산보다 더 큰 짐승을 상상했다. 바람의 울림은 지진의 발자국 소리처럼 당장이라도 땅을 가를 듯 무겁고 거칠었다. 거대한 울림과 함께 자갈과 나뭇가지들이 여기저기 날아가 박혔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는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끔찍한 굉음이었다. 이제 저 지옥의 바람을 피해 숨어야 하는 계곡 끝의 사람들도 바람의 울림을 감지했다. 그들은 각자의 보호막 뒤로 몸을 숨기며 떨리는 가슴으로 생존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바람은, 바람의 운명대로, 바람의 길을 날았다. 수백 개의 돌무더기와 칼날 같은 나뭇가지들이 마치 그물처럼 계곡의 끝을 휘감았다. 안개라도 낀 듯 시야가 어두웠다. 지옥에서 날아온 바람이 외투의 마지막 자락을 거둬들이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지옥이라는 건 없는 법이다. 괴수의 얼굴을 가진 맹렬했던 마지막 바람도, 결국 끝을 선고 받고 먼 지평선으로 사라졌다. 바람을 지키는 자들은 흙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각자의 방패 뒤에서 몸을 떨며 살아있음을 감사했다. 먼지가 가라앉자 사람들은 주변의 동료들을 살폈다. 모두 무사해보였다. 그들은 다시 대열을 정비한 후 정신을 가다듬고 바람의 움직임에 촉각을 기울였다. 오래지않아 청년이 있는 쪽 계곡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바람을 지키는 자들은 나무 몽둥이를 두드려 불어오는 바람 위에 소리를 실어 보냈다. 동굴 입구로 나오려던 몇몇 사람들이 다시 서둘러 동굴 안으로 피신했다. 바람은 계속 되었다. 앞선 바람의 꼬리를 물고 다음 바람이 계곡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마른 청년은 몽둥이를 두드리지 못하고 자신이 고른 큰 나무에 등을 기댄 채 고요히 서있었다. 청년은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의 자취를 지켜보았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바람의 희생자들이었다. 어릴 때의 일이었다. 청년의 가족은 한동안 ‘땔감을 구하는 사람들’에 배정되어 계곡을 걸으며 부러진 나뭇가지들을 주우러 다녔다. 동굴에서 멀리 벗어나는 것은 위험했지만 동굴 주위의 땔감은 이미 소진된 터라 나뭇가지를 주우려면 더 멀리 나갈 수밖에 없었다. 청년은 동굴 밖으로 나가기에는 어린 나이였지만 어른들의 이야기로만 듣던 바람의 힘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어린 청년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졸라서 함께 길을 나섰다. 초록의 산 속에 자리 잡고 있던 계곡은 늘 촉촉하고 아름다웠지만 녹음이 사라진 바람사막의 계곡은 구불구불하고 거칠었다. 이따금, 계곡 끝에서 몽둥이를 때리는 소리가 들리면 세 사람은 서있던 자리에 그대로 엎드린 채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흘렀고, 아버지의 땔감자루는 점점 불룩해졌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루가 다 찼을 무렵, 동굴을 너무 멀리 벗어났다는 걸 깨달았다. 세 사람은 각자의 자루를 메고 동굴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들의 귀가를 환영하는 듯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북소리는 계곡의 좌우 벽을 흔들며 조금씩 우리에게 다가왔다. 앞서가던 아버지가 걸음을 멈췄다. 북소리가 거칠어졌다. 아버지는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고개를 돌려 소년을 쳐다보았다.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손이 소년에게 땅에 엎드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휙. 휙. 무언가가 날아오고 있다고 느낀 순간, 아버지의 몸이 뒤로 밀리면서 메고 있던 자루가 허공을 날았다. 소년은 무너지듯 주저앉아 아기처럼 몸을 웅크렸다. 모든 일이 한순간에 벌어졌다. 계곡 안으로 들소 떼가 달려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땅이 불규칙하게 울렸다. 긴 나뭇가지 하나가 어머니의 눈을 관통했다. 어머니는 그대로 땅위에 쓰러졌다. 어머니는 남은 눈 하나로 아들을 바라보며 울퉁불퉁한 길을 네 발로 더듬어 기었다. 아들 곁으로 기어간 어머니는 아들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덮었다. 어머니의 관자놀이와, 볼과, 팔과, 겨드랑이와, 옆구리에도 나뭇가지가 날아와 박혔다. 어머니의 몸은 점점 고슴도치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소년은 떨었다. 무서워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몸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잠시 후 사위가 고요해졌고, 소년은 눈을 떴다. 팔에 힘을 주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소년은 어머니의 몸을 들어 한쪽으로 가지런히 옮겼다. 어머니의 모습을 감히 바라볼 수가 없었으나… 소년은 어머니를 향해 무겁게 눈동자를 돌려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모습은 처참했다. 청년은 그날을 잊지 못했다. 바람이 몰고 온 죽음의 사신이 자신의 몸을 가르고 들쑤시던 그 순간까지도 어머니는 연약한 살가죽을 방패삼아 아들의 목숨을 지켰다. 청년은 어머니의 마지막 체온과 마지막 냄새를 기억했다. 어머니에게서는 먼지 냄새가 났었다. 흙과 나무의 먼지 냄새, 그리고 어머니의 땀 냄새. 지금, 아직 건장한 청년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아이의 티를 벗어버린 이 마른 청년은, 그가 바라던 대로 ‘바람을 지키는 자’가 되어 사람들을 잔혹한 바람의 칼로부터 보호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청년은 또다시 나무 몽둥이를 두들겨 사람들에게 바람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발끝을, 발목과 종아리를 감싸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청년은 어머니, 아버지와 나무를 줍던 날을 떠올렸다. 장작거리가 넉넉하다며 미소 짓던 어머니의 모습, 실없는 농담을 던지고선 겸연쩍게 웃던 아버지의 모습. 청년은 어머니의 미소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청년이 보호막으로 선택했던 큰 나무는 속 빈 껍데기뿐이었다. 청년의 등에는 어머니 몸에 꽂혔던 것만큼 많은 나뭇가지들이 꽂혔다. 두어 번의 광풍이 더 몰아쳤다. 청년은 나무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계곡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청년의 얼굴을 부비고, 볼을 쓰다듬었다.

청년을 위한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청년의 몸은 나뭇가지가 꽂힌 그대로 동굴의 가장 안쪽에 누여졌다. 그의 마음이 지키려했던, 그의 수고로 인해 안전할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장례의 마지막 날, 금발의 족장은 마른 청년의 시신을 앞에 두고 바람사막의 사람들에게 그를 위한 추도사를 전했다.

“바람은 우리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바람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잃은 이 사람은, 어쩌면 바람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가 바람이 되었다면,

그가 불어가는 곳에 슬픔과 고통이 함께 불어가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시신은 청년이 바람을 지켰던 자리로 옮겨졌다. 그렇게 장례는 끝났다.

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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