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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머니에게서 독립하던 해에 처음으로 홀로 여행을 떠났다. 바다의 곁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긴 여행이었다. 애초의 계획은 한 달이었으나 돌아왔을 때는 두 계절이나 지나있었다. 여행의 시작점으로 잡은 곳까지는 고속버스를 탔다. 아직 추위가 덜 가신 초봄이었다. 늦은 밤이었고, 터미널은 을씨년스러웠다. 나는 가장 가까운 숙소를 찾아 첫날을 보냈다. 몹시 저렴한 여인숙이었다. 방에 비치된 것은 이불 한 채와 작은 주전자에 담긴 물과 물 컵이 전부였다. 낡고 오래된 방이었지만 먼지 하나 없이 말끔했다. 여행의 시작에 딱 알맞고 기분 좋은 느낌의 방이었다. 나는 그 방에서 열흘을 묵었다. 재래시장을 돌아보고, 바닷가를 산책하고, 터미널이나 기차역에 나가 사람들을 구경했다.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고, 가끔 어머니와 누이에게 엽서를 보냈다. 계획대로 나는 남쪽을 향해 걸었다. 바다를 따라 이어진 길은 지루하지 않았다. 도보여행은 예상보다 훨씬 즐겁고 고통스러웠다. 나는 가끔 바닷가를 벗어나 내륙 쪽으로 들어갔다. 논과 밭과 농가의 단층집들을 보며 걷는 길은 고즈넉하고 평화로웠다. 혼자 걷는 길은 외로웠다. 외롭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나를 거둬준 아름다운 어머니와, 친누나처럼 친구처럼 나를 사랑해준 누이를 생각했다. 길을 걸으면서 나는 사람의 삶에는 길이 끝나지 않는다는 아주 단순한 진실을 배웠다. 길의 끝에는 늘 다음 길이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길은 끝나지 않았다. 모퉁이를 수만 번 돌아도 길 다음에는 꼭 다음 길이 이어졌다. 그 먼 길을 걷던 중에 나는 우연히 내가 아는 사람을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내륙의 어느 도시를 걷다가 대로에 서있는 육중한 우체통을 본 순간 나는 그대로 우체통 앞에 앉아 엽서를 썼다. 그립다는 내용이 전부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유원지 한 곳을 둘러보고 대형서점에 들러 여행 중에 읽을 책을 몇 권 산 후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도시 외곽으로 벗어났다. 도시의 아스팔트와 단단한 보도블록보다는 시골의 흙 덮인 갓길이 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혼자 걷는 길에 친구가 되어주는 것은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과 바람뿐이었다. 외로웠다. 한없이 외로웠다. 다시 바다에 닿았을 때, 나는 당시까지의 여정에 녹초가 되어있었다. 나는 거의 주저앉다시피 백사장 위로 쓰러졌다. 짐도 많지 않은 가방이 쌀가마니처럼 무거웠다. 남은 여정을 끌어안기에는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있었다. 나는 물통 뚜껑을 열 기운조차 없어 멍한 눈으로 모래알만 세고 있었다. 나는 마른 조개껍질처럼 마모되어가고 있었다. 파도소리가 들렸는지 안 들렸는지조차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점점 굽어가고 있는 나의 어깨를 누군가가 희미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힘겹게 나를 꿈속에서 건져 올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방문한 동네의 바닷가에서 나를 두드리는 자의 용건은 무엇일까. 한눈에 봐도 껍데기만 남은 새파랗게 젊은 방랑자일 뿐인 나에게 말이다. 어쩌면 누군가 오랫동안 나를 관찰하고 있다가 내가 목공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를 일꾼으로 쓰기 위해 내가 지쳐 쓰러질 때를 기다렸다가 저렴한 값으로 나를 삼키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어머니 집의 거실 유리창을 떠올린다. 어머니 집의 거실은 아침부터 빛으로 충만하다. 나는 그 거실 유리창처럼 하루 종일 숲의 모습을 반영하며 숲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숲의 새벽과, 숲의 아침과, 숲의 낮과, 숲의 해질녘과, 숲의 밤과, 숲의 깊은 밤을 투영하며 숲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부서진 정신을 수습하여 쓰러져있는 내 육신 안으로 돌아온다. 그렇다. 누군가 나를 두드리고 있었다. 안개처럼 희미하게 내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릴 힘도 낼 수 없었다. 나를 두드린 손은 내가 먼저 돌아볼 때까지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내가 등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곳에는 길쭉하고 고운 두 개의 종아리가 있었다. 종아리 아래에는 굽 없는 베이지색 단화 한 쪽이 발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그녀가 서있었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서있었다. 그렇다. 나의 동료이자, 친구이자, 누이인 그녀였다. 누이는 내게 물통을 내밀었다. 목을 축인 후에 우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식사였다. 식당 현관에는 작은 대문만한 전신거울이 걸려있었다. 우리는 재미삼아 거울 앞에 나란히 섰다. 누이와 나의 모습은 마치 곱게 자란 흰 토끼와 진흙탕에서 갓 튀어나온 도사견 같았다. 누이는 배를 부여잡고 웃었고, 식사 중에도 계속 웃음이 나와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누이는 오랫동안 나를 기다렸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오지 않고, 오지 않고, 또 오지 않았다. 누이는 수척해지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아마도 지난번에 보낸 엽서에 다음 행선지나 경유지를 적어두었던 모양이다. 걷는 자가 오직 걸음으로 어디엔가 닿을 날짜를 알 방법이 있을까. 누이는 마냥 기다렸다. 약속도 없는 만남을 한없이 기다렸다. 저녁이 되었고, 우리는 다시 바닷가로 나갔다. 바람이 불었다. 우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모래사장 위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많이 야위었고, 눈동자는 깊은 새벽처럼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외로워보였다. 나는 누이와 그곳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나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주었고,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었다. 누이도 별로 말이 없었다. 따분한 학교생활의 단편을 이야기한 것이 전부였다. 우리는 뜨거운 햇살을 피해 아침과 저녁에만 짧은 산책을 했다. 떠나기 전날 누이는 내게 자신에 대해 많이 알고 싶다고 말했다. 나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싶다고 했다. 누이와 나는 오래 함께 살았으므로 서로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밤이 새도록 ‘내가 아는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정오가 가까운 시각, 내가 일어났을 때 누이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나는 다시 외로워졌다. 하지만 외로움 속에서도 여행은 계속되었다. 나는 남으로 남으로 하염없이 걸었고, 몸은 햇볕에 널어놓은 생선처럼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누구든 그 시절의 내 살을 만질 수 있다면, 마른 낙엽처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 육체와 정신은 고갈과 회복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길에서든, 숙소에서든, 틈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다. 열아홉 권 째 책의 절반쯤을 읽고 있었고, 역시 열심히 걷고 있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걷는 일은 이제 고행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또 다른 바다 앞에 섰다. 그 바다는 내게, 걸어서는 더 이상 아무 곳으로도 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른 논을 보며 시작한 여행은 모내기를 지나고, 가을걷이를 끝내고, 어느덧 서리가 내리는 계절에 다다르고 있었다. 나는 그 바닷가에서 며칠을 더 보냈다. 첫눈이 내렸고, 나는 여행을 마치기로 했다.

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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