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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49 . 젖은 바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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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잦아든 지 보름이 넘었다. 선장은 출항을 준비했다. 선원은 나를 포함해 모두 열두 명이었다. 도리스 호는 주로 그물을 써서 고기를 잡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낚싯대를 쓰기도 했다. 선장은 창고에서 내가 쓸 낚싯대를 가져와 손질하고 나에게 낚싯대 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일주일동안 그물을 손질하고 배를 청소했다. 선원들은 긴장한 모습이었다. 나이 많은 선원 두엇이 섣부른 출항은 위험할 수 있다고 만류했지만 선장의 결정은 확고했다. 대신에 위험이 감지되면 주저 없이 회항하는 것에 동의했다. 선장은 배에 기름을 채우고 여분의 기름을 더 챙겨 배의 창고에 쌓아두었다. 엔진을 비롯한 배의 기계들을 점검하는 것은 선장의 몫이었다. 선원들은 모두 느리고 꼼꼼하게 일했다. 나는 뱃일이 처음이었으므로 기구를 다듬고 정리하는 일보다는 주로 청소를 했는데 청소조차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갑판처럼 늘 파도에 노출될 수 있는 곳은 선원들이 작업 도중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미끄럼 방지용 왁스를 꼼꼼하게 발라두어야 했다. 잡은 물고기를 저장할 선창은 일단 비우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살아있는 물고기들은 모두 꺼내어 필요한 선원들이 나누어가졌고, 물을 뺀 선창에는 서너 명이 동시에 들어가 벽과 바닥을 말끔하게 닦아낸 후 다시 바닷물을 채웠다. 노파는 우리가 배에서 먹을 식량과 부식을 준비했다. 말린 생선과 해산물, 해초류, 육포와 각종 면류, 향신료와 양념 등을 박스에 담아 배의 주방을 채웠다. 출항일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선장은 자주 부두에 나가 바다와 하늘의 움직임을 살폈다. 비는 꾸준히 내렸지만 폭풍우는 잠들어있었다. 이대로 끝나준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나는 바다를 바라보는 선장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노파의 집에서는 매일 선원들의 모임이 있었다. 노파는 항상 20인분의 식사를 준비했다. 가끔은 20인분도 모자랄 때가 있었다. 선원들은 체격답게 엄청난 양을 먹어댔다. 긴 시간 조업을 쉬었으므로 각자의 위치와 일에 대한 점검과 정비가 필요했다. 선장은 마치 조업 교본이라도 읽듯 각자의 일과 위치와 위험에 대비한 행동 수칙 등을 반복해서 가르쳤다. 선원들은 도리스 호의 팀원답게 고도의 집중력으로 선장의 말을 새기고 또 새겼다. 나에게는 방대하다고 할 수도 있을 분량의 기술이었지만 나 역시 배 위에서의 실수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 메모하고 공부했다. 나는 선원들이 돌아가고 난 후에도 노트를 펼쳐놓고 그날 배운 것을 복습했다. 조업 중에는 사소한 실수라도 목숨을 위협할 수 있었다. 선장은 내게 그물 당기는 법과 밧줄 다루는 법, 출렁이는 배 위에서 중심을 잡고 서있는 법 등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긴 항해에 대비해 뱃멀미를 다스리는 법도 배웠다. 고기잡이배를 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서 바다를 구경하고, 때에 맞춰 식사를 하고, 편안히 누워 잠을 자는 크루즈 여행이 아니었던 것이다. 훈련은 혹독해야했고 채찍은 각자의 손에 들려있었다. 우리는 정박한 배 위에서 실전을 가정하여 동선과 작업 호흡을 맞췄다. 부둣가를 산책하는 사람들은 우리들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간혹 다른 배의 선장들이 지나가던 길에 배에 들러 도리스 호의 출항을 걱정하기도 했다. 그들은 아직 폭풍우가 멈춘 것이 아니어서 배를 끌고나갔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며 선장을 말렸다. 그럴 때마다 선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선장의 눈동자는 자신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드디어 출항일이 되었다. 우리 모두는 이른 식사를 마치고 새벽 부둣가로 나갔다. 나는 노파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노파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내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바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잔잔했고 비는 이슬비로 바뀌어있었다. 선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선원들의 표정 역시 무덤덤했다. 노파는 우리들을 차례로 안아주었고, 배와 선원들의 안전을 위해 짧게 기도해주었다. 잠시 후 도리스 호는 세 번 기적을 울리고 젖은 바다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