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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불면인

불면인 #12


지난 밤, 떡볶이 컵을 핥던 눈동자가 하늘로 시선을 옮긴다.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는 새벽이 몽환인 듯 아름답다. 내 평생 이렇게 맑은 새벽을 본 적이 있던가? 주워 문 꽁초 한 모금 뒤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담배 한 모금. 한겨울의 아지랑이. 손등이 죄다 터서 마른 논바닥마냥 쩍쩍 갈라진다. 당연한 일이다. 온통 색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흑백으로 갈라지는 손등을 보다가 자연스레 지난 일을 떠올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행운이 그리 자주 찾아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소문으로 들어 행운의 존재를 안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돼지꿈 한 번 꿔본 적이 없고, 길에서 백 원 이상을 주워본 적이 없고, 노력하지 않고 뭔가를 얻어 본 적도 없고, 오히려 노력한 것보다 못한 결과를 얻은 적이 많았다. 그날도 별 볼 일 없는 하루였다. 오후 늦게, 아니 거의 초저녁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고 평소처럼 일어나자마자 담배를 물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눈을 비비다가 단단한 눈곱이 낀 걸 발견했고, 손톱으로 긁어냈다. 눈곱에는 짧은 눈썹 하나가 눌어붙어 있었다. 나는 소원도 빌지 않은 채 가볍게 손가락으로 한 덩이가 된 눈곱과 눈썹을 튕겨 화장실 바닥으로 날려버리고, 일을 보고, 뒤처리를 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동안 거실을 쳐다보다가 발견한 모기 한 마리를 잡아서 라이터 불로 태워 죽이고 저녁식사로 크림수프를 끓였다. 하늘은 아침보다 더 무거웠고 바람도 거세게 불었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았다. 묘한 분위기의 저녁. 뭔가 그리워할 것을 찾아야 할 것 같은 밤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산책을 나섰다. 느린 걸음으로 동네 한 바퀴를 돌다가 편의점 앞에 섰을 때 문득 갈증이 느껴졌다. 뜨거운 커피를 한 캔 샀다. 편의점을 나서는데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면서 치통이 몰려왔다. 가장 가까운 약국에 들어가 가운도 입지 않은 젊은 약사에게 진통제를 부탁했다.

“한 번에 두 알씩 드십시오. 24시간 지속 효과가 있습니다.”

약사가 말했다.

“한 번에 한 알씩 먹으면 12시간 지속 효과가 있는 건가요?”

내가 물었다.

“두 알을 먹었을 때 효과가 극대화 되는 약입니다.

처방을 지키는 것이 효과가 좋습니다.”

약사가 대답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두 알을 먹고, 남은 두 알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삼천 원입니다.”

비싼 진통제다. 나는 삼천 원을 지불하고 약국 안에 놓인 긴 소파에 앉아 진통제 상자 안에 들어있던 설명서를 찬찬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효능/효과 :

관절염, 골 관절염, 강직성 척추염, 급성 근 골격 질환, 급성통풍, 요통, 월경곤란 증, 외상 후/수술 후/발치 후 염증 및 동통.

이런, 월경이 곤란할 때도 먹을 수 있는 약이었다. 그런데 월경이 곤란하다는 건 어떤 느낌의 증상일까?

부작용 :

소화성 궤양, 토혈/하혈 등 위장출혈, 위 복부통, 식욕부진, 구역, 구토, 설사, 구내염, 소화불량, 변비, 설염, 쇼크, 중독성 표피 괴사 증, 손톱 박리 증, 탈모, 빈혈, 혈소판 감소, 재생 불량성 빈혈, 골수 기능 억제, 백혈구 감소, 고혈압, 울혈성 심부전, 급성 심장질환, 황달, 간염, 발진, 가려움증, 졸음, 현기, 두통, 수족의 저림, 우울, 신경질, 환각, 감정변화, 정신혼란, 안면 및 손의 알레르기성 부종, 전신권태감, 시야 흐림, 어깨 결림, 발열, 호흡곤란 그리고 드물게 기관지 경련, 두드러기, 혈관부종, 혈관염이 보고된 바 있다.

나는 갑자기 토하고 싶어졌다. 약이라기보다는 독약에 가깝다. 그렇지,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치아의 고통을 24시간 동안 누르기 위해서 저렇게 많은 위험을 감수해가며 시한폭탄 같은 알약을 삼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은 아니다. 삼십 분쯤 지나자 치통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설명서에 적혀있던 어떤 부작용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저 모든 부작용이 일어났더라도 너무 미미해서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사람 잡는 약을 한 알도 아니고 두 알씩 먹어야 ‘효과가 좋습니다.’ 라고 했던 약사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효과는 좋았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도 치통은 재발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운이 좋은 것일까? 삶의 반이 불행이라면 나머지 반은 행운일지도 모르지. 행운과 불행이 정확히 반 토막으로 나뉘어 발생하도록 구조되어 있다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순서대로 한 번은 행운, 그 다음에는 불행이 차례대로 일어나는 구조라면 인생이 조금 더 재미있어질까? 한 번은 변비에 걸려 죽도록 고생을 하고, 한 번은 길에서 돈을 줍고. 한 번은 놀이터에서 우연히 옛 원수를 만나고, 한 번은 평생 찾던 책을 헌책방에서 싼 값에 구입하는 행운이 오고, 뭐 이런 식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을바람 같은 것이 팔을 휘감았다. 문득 내가 바다를 그리워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그날 밤 그리워해야 할 것은 바다였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매트리스에 엎드린 채 팔을 뻗어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집어 들었다. 하늘은 그대로 잿빛이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지 않았다. 문득 나는 은행에 예금해놓은 내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 보았다. 백만 원이 되지 않는다. 곧 오십만 원으로 줄어들 것이고, 삼십만 원으로 줄어들 것이고, 십만 원으로 줄어들 것이고, 십만 원 미만이 되면 나는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거나 지인들의 옆구리를 찔러 생활비를 충당할 것이다. 나는 책을 덮고, 주방에서 냉동만두 여섯 개와 계란 하나를 넣고 라면을 끓여 먹은 후, 뜨거운 물로 긴 샤워를 하고 간단하게 짐을 꾸렸다. 통장 잔고가 얼마든지 간에 나는 바다를 그리워하기로 했고, 그리운 바다를 보러 가기로 결정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오직 바다만 보이는 그곳. 바다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곳.

서해의 한 터미널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인적이 드문 해변으로 향했다. 해변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전히 을씨년스러웠다. 잿빛 하늘 때문이었을까? 서늘한 바람 탓이었을까? 그립고 아름다운 바다가 아니라 마치 인적 없는 거대한 묘지 입구로 들어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오래 전에 묶었던 민박집을 다시 찾았다. 민박집 주인 여자가 나를 오래 쳐다봤다.

“전에도 오셨죠? 낯이 익어요.”

“가끔 옵니다.”

“혼자 오셨나 봐요? 며칠이나 계시려고?”

“오래 있지는 않을 겁니다. 한 이삼 일 정도.”

“평일에는 손님이 없어서 주방도 혼자 쓰시는 거나 다름없어요.”

주인 여자는 부산을 떨며 주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묵었던 손님들이 두고 간 양념거리들과 라면 등의 부식을 정리하더니 필요하면 써도 좋다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여주인이 안내해준 방에 짐을 풀어놓고 해변으로 나갔다. 썰물에 바닥이 드러난 해안은 내가 머릿속에 그렸던 모습처럼 흑과 백의 색뿐이었다. 회색 하늘과 회색 바다와 회색 모래사장밖에 안 남은 거대하고 빈 풍경. 어쩌면 나는 내 가슴 속의 비어있는 공간보다 더 큰 공허를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공허로 내 속의 작은 구멍을 메우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리움이 가득한 채로 바다를 보러 달려오면, 바다는 더 큰 그리움으로 나를 껴안고 놓아주지 않는다. 두 개의 빵으로 연명하며 머나먼 길을 걸어 열 개의 빵을 구하러 왔는데 남은 하나의 빵마저 빼앗기고 내쫓기는 기분. 내가 그리워하는 바다는 늘 그런 식이었다. 민박집 주방에서의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바닷가에 나가 시간을 보냈다. 나는 꼬박 나흘 동안 바다와 마주하고는 닷새 째 되는 날 짐을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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