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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51 . 바다를 지켜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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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먼 거리를 달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멈춘 자리는 도리스 호가 주로 그물을 내리는 자리라고 했다. 선장은 배의 엔진을 끄고 조타실 안에 앉아 종일 하늘과 바다를 관찰했다.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육지에서처럼 그저 일상적인 하루를 보냈다. 끼니때마다 밥을 먹었고, 심지어는 낮잠도 잤다. 나는 우리들이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늙은 선원 하나가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내게 말했다.

“출항 첫날은 항상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 바다를 지켜보는 거야. 일종의 염탐이지. 산이 그렇듯 바다 역시 언제 얼굴을 바꿀지 알 수 없는 존재니까.”

늙은 선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침실은 좁았지만 책을 읽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나는 선장의 서재에서 책 몇 권을 골라왔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는 절대로 글자를 읽지 말라고 배웠지만 다행히도 바다는 굳은 황토처럼 단단했고 배는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수면이 떨리기 시작했다. 비는 여전히 아이처럼 온순하게 내렸다. 잔잔히 흔들리는 배 안에서 나는 느리게 책을 읽었다. 내가 뽑아온 책들은 모두 시집들이었다. 긴 텍스트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다시 선실로 돌아왔다. 나는 왜 선장이 그림이나 사진이 들어간 책들을 좋아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배 위에서의 시간은 육지에서의 시간보다 한결 느리게 흘렀고 지루했다. 책을 읽다가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끼고 책을 덮으려고 할 때쯤 선장실로부터 그물을 내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자정이었다. 갑판은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빗줄기가 제법 굵었다. 그물을 내리는 데는 30분쯤 걸렸다. 몸은 흠뻑 젖었지만 비에 젖었는지 땀에 젖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른 선원들이 모두 선실로 돌아가고 난 후에도 나는 들어가지 않고 갑판 위에 남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검은 바다 위로 떨어지는 비의 모습은 꽤 매력적이었다. 빗방울은 사선과 포물선을 오가며 비틀거렸다. 비에 젖어가는 파도도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배 위에 서있는 법을 배웠지만 실전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다. 나는 갑판의 난간을 양손으로 꼭 잡고 버텼다. 바다의 비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검은 바다의 비는 어지러웠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는 끝내 현기증을 일으켰다. 흔들리는 바다를 나무랄 수는 없었다. 나는 거의 기다시피해서 선실로 돌아왔다. 큰 사고는 없었으니 나에게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첫날이었다. 우리는 그물을 내려놓은 채로 밤을 보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