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58 . 끝나지 않을 긴 꿈의 품 안에...

*

노파는 선장의 고기잡이가 시작된 후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온실에서 보냈다. 화분의 위치를 정리하고, 분갈이와 가지치기를 하고, 물을 주고, 꽃과 나무들에게 말을 걸고…. 생성과 성장의 시간을 지나 소멸의 때에 가까워지면서 노파는 자신의 삶 동안 만났던 모든 인연이 즐거움과 행복이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돌보는 온실 안의 화초들조차도 그녀에게는 모두 고마운 인연이었다. 사막의 황금빛 모래와, 살을 태울 듯 이글거리던 태양과, 반짝이는 밤과, 고요한 새벽과 아침, 노래하는 바람과, 비의 오케스트라와, 모래사막의 아버지와, 사막의 사람들과, 고기 잡는 아들과, 늘 비에 젖어있는 이 도시까지. 노파의 삶에는 소음이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노래였고, 고운 멜로디였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낮에는 태양이 떴으면 좋겠다고 노파는 생각했다. 낮에는 대지를 녹일 듯 태양이 내리쬐고, 밤에는 비가 내리는 하루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를 휘감고 흐르는 바람의 몸짓을 느끼며 빗물 한 모금으로 하루의 양식을 마감하고 잠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노파는 드넓은 대지 위에 누워있으면서도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야 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달과 별이 잠겨있는 검푸른 바다 같은 하늘과 투명한 옷자락을 휘날리며 비행하는 바람.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검불 한 자락. 밤새 마음을 두드리며 속삭이고 노래하던 사막의 모든 생명들. 인생은 긴 노래가 아닐까? 라고 노파는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기나긴 슬픈 노래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굴곡과 희비를 반복하는 복잡한 변주곡일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짧은 울림 뒤에 예고 없이 끝나버리는 단말마의 허무한 노래일 수도 있을 것이다. 노파는 자신의 육신이 늙어가고 있는 것이 슬프지 않았다. 머지않아 만나게 될 죽음의 얼굴도 인생에서 만나야 할 여러 인연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노파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죽음의 표정을 상상할 때마다 그 표정 속에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반영을 보았다.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지나간 삶을 마주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마지막 순간. 사람은 늘 새로운 것을 찾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만, 그 대가로 세상은 낡고 헌 것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었다. 노파는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느꼈다. 아름다움을 찾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세상. 그녀가 살아온 인생과 그녀가 사는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녀의 손에 닿은 이파리들은 따스한 온실 안에서 요람처럼 흔들렸다. 아름다운 떨림이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는 찰나의 떨림. 온실의 모든 생명들은 노파의 존재와 함께 시작되었고, 노파의 부재와 함께 숨을 죽였다. 화초들은 노파가 온종일 책만 읽고 있더라도 그녀가 오랫동안 온실 안에 머물러주기를 소원하는 듯해 보였다. 이파리들은 꿈을 꾸었고, 줄기들은 평화로워 보였다. 노파의 가볍고 여린 몸은 온실 안의 어떤 평화와 고요도 깨뜨리지 않았다. 노파는 식사시간 외에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꽃이 핀 식물을 보았을 때처럼 노파는 온실을 떠나지 못했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온실 안에는 빗방울의 울림이 가득히 번져나갔다. 노파는 오랜만에 온실의 지붕을 열었다. 어깨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무거웠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눈을 감았다. 비에 몸이 젖어가는 것을 느끼며, 노파는 먼 옛날 망각의 강 앞에 섰던 시간을 떠올렸다. 모든 걸 흘려보내려했으나 모든 상처를 상처 난 모습 그대로 간직하기로 결정했던 그날을…. 기나긴 비의 세월이 흘러갔지만 세상은 단 한 번도 얼어붙지 않았다. 바다가 흘러넘쳐 육지를 침범하지도 않았다. 이상하고도 긴 계절이었다. 노파는 자주 깊은 생각에 잠겼다. 대부분 고개를 숙인 채였고,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를 감싼 구름은 대기를 삼킨 안개처럼 경계 없이 무한대로 펼쳐져있었다. 그 풍경은 마치 도시를 사랑하는 거대한 검은 짐승의 애절한 포옹을 떠오르게 했다. 시간은 구름처럼 느리게 흘렀고, 때로는 벌새의 날갯짓처럼 시선과 지각으로 느끼지 못할 만큼 빠르게 흐르기도 했다. 가끔, 대부분의 사람들을 상대로 다가오는 늦은 깨달음은 후회할 시간조차 주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노파의 삶은 반딧불을 닮아있었다. 여리고 가느다란 빛. 설레는 가슴처럼 불규칙하게 떨리지만 선명하고 곱게 빛나는, 가늘고 여리고 아름다운 빛. 온실 안으로 바람이 흘러들었다. 오랜만이었다. 반가운 바람이었다. 비와 바람. 비와 바람의 숨소리. 비와 바람의 노래…. 노파는 따스한 바람이 흐르는 온실의 한가운데, 작은 사막 앞에 앉아 끝나지 않을 긴 꿈의 품에 조용히 안겼다. 사막 위로 바람이 불었고, 노파의 체온이 담긴 마지막 숨이 바람 위에 실렸다. 바람의 눈동자에 잠시 눈물이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