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불면인2018. 12. 13. 17:21


한 끼

빈속에 똥을 싸는 꿈을 꾸어놓으니 평소의 아침보다 배가 몇 갑절은 더 고파왔다. 동굴을 빠져나오듯 꿈에서 빠져나와 잠자리를 털고 일어난 나는 하릴없는 오늘의 산책을 시작했다. 비둘기 한 마리가 싸한 바람 날리는 골목길 귀퉁이를 배회하고 있었다. 비둘기도 혼자였고, 나도 혼자였다.


석쇠는 천 마리의 생선은 구웠을 법하게 낡아 있었다. 공단의 매캐하고 무거운 공기와 함께 긴 세월을 보냈음이 한눈에 보인다. 생선기름에 녹이 슬고, 생선기름으로 녹을 녹이는 일을 반복했을 것이다. 테두리에는 녹이 나고, 가운데는 둥글게 기름에 절어있다. 어쩌면 만 마리쯤의 생선이나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생선을 구워냈을지도 모른다. 이른 아침의 생선구이골목은 사람이 더 이상 살지 않는 폐허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매일 사람 손이 닿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듯해 보이는 무생물스러운 풍경. 사람이 살았던 곳도 아니요, 사람이 살 곳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의 거리. 그러나 이곳은 느리지만 가볍게 담을 넘을 줄 아는 구렁이의 매끄러운 뱃살처럼 식사시간마다 자연스레 홍조를 띤다. 오래 누워도 데워지지 않는 콘크리트 위에서의 잠자리는 늦게야 겨우 잠들 수 있을 만큼 오래 냉기를 내뿜는다. 내가 잠에 살짝 닿을 무렵이면 사람들은 이미 일터에 출근해있고, 내가 언 몸을 일으켜 세울 때쯤이면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 앞에 줄을 선다. 생선거리가 살아나는 시간이다. 구워지는 생선은 값싸고 흔한 것들이다. 꽁치, 고등어, 이면수, 삼치, 조기, 물오징어 등등. 물오징어는 석쇠가 새까매지도록 고추장을 발라 굽는다. 고추장이 숯에 타는 냄새는 여느 생선구이의 냄새보다도 더욱 잔인하게 빈 내장을 괴롭힌다. 병어나 갈치 같은 값비싼 메뉴도 있다. 그리고 도다리, 청어, 갯장어, 전어, 주꾸미, 볼락과 민어 같은 계절 메뉴들을 적어놓은 크고 작은 판자들이 가게 밖 여기저기에 난잡하게 붙어있다. 나는 조금 먼발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생선 손질하는 여자와 생선 굽는 아저씨의 모습을 바라본다. 식당 안에서는 반찬을 준비하는 찬모와 식사를 나르는 여자 하나가 분주히 움직인다. 생선의 몸에서 나온 기름이 벌겋게 달궈진 참숯 위로 뚝뚝 떨어지며 석쇠 위로 불꽃이 피어오른다. 맛있는 불꽃. 사람은 원죄를 타고난다고 했던가? 문신처럼 영혼에 새겨져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죄악. 하지만 저 맛있는 냄새를 일구어내는 불꽃으로 영혼을 태우면 원죄조차도 말끔히 지워져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불길을 살려내는 맛있는 기름에 타오르는 영혼. 아름다울 것 같다. 추한 영혼은 아름답게, 아름다운 영혼은 더욱 아름답게. 그러나 영혼은 타오르지 않고, 불 위에서 익어가는 것은 오직 생선과 식욕뿐이다. 나는 생선을 굽는 남자와 자주 눈이 마주친다. 생선을 굽는 일은 지루할 것이다. 자신의 속을 채우기 위해 굽는 것이 아닌 밀려드는 손님들의 입에 들어갈 생선을, 그것도 진종일 앉은 채로 수백 수천 마리를 구워내는 일에는 인내를 넘어선 도가 필요할 것이다. 남자는 익어가는 생선에서 자주 시선을 놓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 두리번거림 속에 내가 고정 게스트로 앉아있다. 남자의 시선은 자주 나와 마주치고, 마주치고 나면 짧거나 긴 시간 동안 서로를 읽는 일에 분주해진다. 내가 남자의 손놀림과 표정을 주시하듯 남자 역시 나의 남루한 차림새와 씻다 만 듯 지저분한 얼굴을 유심히 살펴본다. 불편하다. 내가 남자의 시선을 불편해하듯 남자 역시 나의 시선이 불편할 것이다. 나는 남자와의 눈싸움을 피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본다. 뭔가 작은 광고 전단지라도 있다면 그걸 읽는 동안에는 생선구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선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가까운 발치에 누런 갱지 몇 장이 굴러다닌다. ‘가정통신문’, 정겨운 낱말이다. 학교에서 학부모에게 보내는 통신문. 나도 어릴 적에 저런 종이를 수차례 집으로 날랐던 경험이 있다. 보통은 이러저러한 일로 수업이나 과외 활동에 돈이 들어가니 아이 편에 얼마 얼마를 쥐어 보내라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던 기억이다. 하지만 내가 주운 통신문에는 놀랍게도 학부모가 돈을 쓰지 않고도 아이들 점심을 걱정하지 않도록 학교에서 무상급식을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심지어는 한 달 치 식단도 한 페이지 가득 빼곡하게 들어차있다. 하루 평균 대여섯 가지의 메뉴가 제공된다. 공짜로 밥을 주는 세상이라니,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공짜가 아니었던 것을 공짜인줄 착각하며 먹고 살던 시절이 떠오른다. ‘우리 학교는 친환경 농산물 33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라고 굵은 글씨로 쓰여 있다. 식단을 살펴보자. 비빔밥, 맑은 콩나물국, 호박 지짐, 봄동 겉절이. 꽤 괜찮은 메뉴다. 다음 날 - 차조밥, 육개장, 오이달래무침, 오징어 김치 전, 통 배추 겉절이, 우유. 그 다음 날 - 현미밥, 미더덕 꽃게탕, 두부조림, 골뱅이 소면무침, 열무김치, 우유. 매일 이런 점심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문득 어릴 때 내가 좋아했던 메뉴와 겹치는 것이 몇 가지나 되는지 궁금해진다. 근대 된장국, 동태매운탕, 청국장찌개, 오징어삼겹살불고기, 도토리묵무침, 오이지무침, 배추된장국, 나박김치, 고등어 김치 찜, 이면수 구이, 생선가스, 두부조림, 열무김치, 메추리 알 장조림, 부대찌개, 참나물 겉절이, 백김치, 쇠고기 미역국. 참으로 아름다운 음식들이다. ‘잔반 없는 날’에는 잔치국수나 카레, 짜장 밥 등이 나온다. 공짜로 먹을 수 있는 아름다운 밥상. 하루에 두 번, 아니 하루에 단 한 번만이라도 이런 밥상을 받아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굵은 침이 마른 목구멍을 타고 꿀꺽 넘어간다. 길 건너편에 앉은 생선 굽는 사내의 귀에까지 들릴 만큼 육중한 소리다. 혹시 침 삼키는 소리를 들키지 않았을까 싶어 생선 굽는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려 눈치를 살핀다. 남자는 조금 전보다 더욱 분주한 손놀림으로 생선을 굽고 있다. 그새 손님이 늘어난 모양이다. 한겨울인데도 남자는 반팔차림이다. 종일 불과 씨름해야하는 탓일 것이다. 비가 내리면 날지 않는 새가 있다. 멀리서만 봐서 어떤 새인지도, 이름도 모른다. 어른 손 한 뼘을 훌쩍 넘는 회색 깃털을 가진 작지 않은 새다. 이 새는 비가 내리면 나뭇가지 위를 폴짝거리며 뛰어오른다. 마치 사람이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모양새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건너뛰기도 하지만 절대로 날아오르는 법이 없다. 남자의 팔뚝을 보다가 문득 비가 내리면 날지 않는 새가 떠올랐다. 남자의 팔은 살과 털로 가득하다. 이 새와 잘 어울릴 것 같은 모양의 팔뚝이다. 생선 굽는 일만으로 가꾼 팔이다. 이른 아침에 생선을 배달하러 오는 남자의 팔은 매끄러운 구릿빛 피부에 불규칙하게 자리 잡은 근육으로 번들거린다. 같은 생선장수의 다른 살을 비교해보는 일은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같은 뿌리를 둔 다른 삶. 어떤 사람은 살기 위해 죽도록 생선을 나르고, 어떤 사람은 살기 위해 죽도록 생선을 굽는다. 나 같은 사람은 끝나주지 않는 삶 덕분에 쪼그라든 위장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이 생선을 나르고 굽고 먹는 모습을 바라본다. 모두들 무언가를 한다. 나 역시 무언가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노력과 그 와중에도 배를 채우고 잠을 자려는 노력. 공기는 맑고 날은 흐리다. 태양을 가린 구름 아래에서 사물들은 본연의 색으로 빛난다. 노란 혹은 붉은 빛을 머금지 않은 색은, 색 그 자체로 차분히 가라앉아있다. 외부로부터 방해 받지 않는 모든 것들은, 방해하고자하는 모든 요인들로부터 자유롭다. 생선 굽는 남자가 처음 석쇠를 들었을 때는 어쩌면 생선 굽는 일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가끔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보고 나는 짐작할 수 있다. 어떤 순간, 딱 알맞게 익은 생선구이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서 그가 일로만 생선을 굽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즐거운 일이라도 사람의 삶속에 들어오면 언젠가 지루해지고 만다. 삶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삶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는 단 하나의 즐거움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남자의 얼굴에서 생선을 굽는 일에 만족하는 단말마의 미소조차 사라질 무렵이면 남자는 생선이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숯이, 어쩌면 숯과 불과 생선이, 생선구이 냄새를 맡으면 침이 고여 드는 입안의 혀가 자신을 속였다고 원망할지도 모른다. 식사 후에 손님들이 내미는 식대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생선과 숯과 혀와 돈이 자신을 속이고 자신의 인생을 지루함의 나락으로 빠뜨렸다고 원망할지도 모른다. 원망의 시작은 해가 지고 밤이 내리는 풍경과 닮아있다. 달콤했던 행복의 기억은 안개에 파묻히고, 찬란하게 빛나던 사위는 어둠에 잠겨버린다. 즐거움은 잠시지만 지루함은 한번 시작되면 끝나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생선구이 집에도 평화가 찾아온다. 남자는 이제 가게 식구들과 자신이 먹을 생선을 굽는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이란 없을 테지만 생선은 종의 다양성을 무기로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은 도루묵, 어제는 삼치, 그제는 고등어, 내일은 갈치, 모레는 이면수… 구이가 물리면 조림이나 찌개로 돌변하기도 할 것이다. 딸린 반찬은 몇 가지나 될까? 아마도 국물이 기본으로 하나쯤 있을 것이고, 서너 가지의 단출한 반찬일 것이다. 남자는 석쇠 위에 올렸던 생선을 그대로 들고 가게로 들어간다. 대포 집 스타일의 둥근 스테인리스 테이블 위에는 이미 찬들이 놓여있다. 남자는 그제야 얇은 겨울 잠바를 걸쳐 입고 늦은 식사를 시작한다. 식사 중간 중간 사내는 나와 눈이 마주친다. 가게 식구들의 식사는 조용하고 느리다. 대화도 없다. 큰 욕심 없이 살면서 주어진 삶을 떠나거나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진 단단함이 느껴진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정속 주행 인생. 무덤덤한 표정으로 식사가 계속된다. 바닥에 닿은 영혼이 낙하를 두려워하지 않듯, 다가올 것이 없는 현실 앞에 선 자들이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듯, 육중하고 흔들림 없는 일꾼들의 점심식사가 계속된다. 남자는 잠시 후 또 고개를 돌려서 가게 밖, 길 건너편에 앉아있는 나를 쳐다본다. 마치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깜빡여본 적 없는 것처럼 잘 고정된 눈동자다. 남자와의 눈싸움에 피로해진 나는 문득 걷고 싶어진다. 긴 산책 말고 가벼운 산책. 일 킬로미터쯤 걸으면 열대어와 어항을 파는 가게가 있다. 생선 굽는 냄새로 시작한 아침이니 다음 순서로 수족관을 구경하는 건 왠지 잘 어울리는 순서인 것 같다. 죽어서 식탁 위에 오르는 물고기와 어항에 갇혀 생명을 이어가는 물고기. 그 다음은 무엇이 좋을까? 일단 걷자. 작은 동네 슈퍼마켓을 지나고, 동네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주인이 사는 분식집을 지나고, 대규모 카센터를 지나서 대로변으로 나서면 큰 은행이 있고, 은행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내·외장을 말쑥하고 세련되게 꾸며놓은 열대어 판매점이 있다. 골목 안의 세상과 대로변의 세상은 색과 빛과 온도부터가 다르다. 심지어 냄새조차도 다르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 대로에 나서면 사람들에게서도, 길에서도, 나무에게서도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골목을 벗어나서 대로에 발을 내딛는 순간 눈이 부셔오고 현기증이 인다. 가뜩이나 초라한 차림의 자신이, 스러지는 마른 재처럼 더욱 무가치하게 보인다. 나 같은 사람은 이렇게 말끔하고 빛과 색으로 눈부신 대로변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 특히나 거울처럼 빛나는 쇼윈도 앞을 오래 서성이는 것은 더욱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잠시만. 아주 잠시만 물고기들을 구경하고 싶다. 십 미터는 족히 넘을 듯 긴 쇼윈도는 여러 대의 수족관으로 꾸며져 있고, 각각의 수족관마다 오색찬란한 열대어들이 종류별로 담겨 있다. 어떤 열대어는 현란한 색만큼이나 움직임도 화려하다. 넙적하고 큰 덩치의 열대어는 바쁠 일 없다는 듯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젓는다. 수족관마다 안에 담겨있는 열대어의 이름표가 붙어있다. 코리도라스, 네온테트라, 블랙네온테트라, 구피, 알리, 제브라플레코, 프론토사, 샤페, 아로와나… 나는 ‘구피’ 라고 쓰인 수족관 앞에 선다. 빠른 듯 느린 듯 다양한 속도로 유영하는 구피들은 색도 다양하고 크기도 다양하다. 아마도 삼사 대쯤에 걸쳐있는 부모 자식들이 모두 한 수족관 안에 있는 듯하다. 꼬리가 화려한 놈들이 있는가 하면 단정한 붉은색으로만 치장한 놈들도 있다. 구피가 담긴 수족관 안에는 몸 전체가 붉은 색인 달팽이들도 함께 산다. 얼핏 세어 봐도 수십 마리가 넘는다. 느리게 움직이고, 어떤 건 아예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모래 바닥과 유리와 수초 이파리 모두가 달팽이들의 체중을 지탱하느라 분주하다. 큰 달팽이 몇 마리가 수족관 위쪽 구석에 몰려있다. 그 중 한 마리가 유리에 붙어있던 몸통의 힘을 빼자 수족관을 휘감고 도는 물살에 휩쓸려 긴 유영을 시작한다. 비눗방울처럼 물속을 둥둥 떠다니던 달팽이가 어느덧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았는지 몸통을 길게 빼더니 근사한 자세로 수초에 몸을 붙인다. 구피 몇 마리가 총알처럼 튕겨나가며 자리를 비켜준다. 느리고 현란한 움직임으로 가득 찬 수족관 안의 세계는 아무리 오래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 작은 공간 속, 화려한 수중무대에서 펼쳐지는 늘 새로운 쇼. 아마 신들도 작은 공 위에서 바글대며 살기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간들을 구경하는 일이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수족관 한쪽 구석에는 어린 구피들이 떼 지어 모여 있다. 아마도 같은 날, 같은 어미에게서 난 자식들인 모양이다. 눈에 힘을 주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다. 세상을 본 지 얼마 안 된 듯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하지만 큰 구피들이 괴롭히기라도 하는지 자신들만의 군집을 이루고 그 덩어리를 울타리 삼아 절대로 그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다. 주변을 맴도는 큰 구피들도 이 어린 무리들 곁으로 함부로 다가가지 못한다. 가끔 짓궂은 어른 구피들이 울타리 바깥의 새끼들을 건드리면 어린 새끼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울타리를 빙 돌아 다시 울타리 안으로 돌아온다. 중간 크기쯤 되는 어떤 구피는 바닥과 수면을 쉬지 않고 오간다. 벌을 받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이어트라도 하는 것인지 불똥이 튀어 오르는 속도로 솟아올랐다가 바닥으로 낙하하기를 반복한다. 속도로만 보자면 거뜬히 물 위로 뛰어오를 수 있을 것 같지만 결코 수면 위로는 날아오르지 않는다. 바깥세상이 두렵기라도 한 것일까? 붉은 먹이를 쏟아 붓는 거대한 존재들이 무서운 것일까? 물속 세상에도 육지를 갈라놓는 지진처럼 균열이 생길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불안에 떠는 것일까? 자신의 삶이 이어지는 공간이 자연이 아니라 공장에서 찍어낸 유리상자라는 것을 알고 불쾌해하는 것일까? 큰길의 오후가 조금씩 기울어가고 있다. 바람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쪽을 향해 서서 여덟 시 방향을 슬며시 바라보면 며칠 후 반으로 쪼개질 달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쇼윈도 안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티브이를 켜놓고 앉아있다. 보랏빛 하늘 아래에 높게 자란 야자수 잎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장면이다. 나도 모르게 내 귀에만 들리는 독백이 흐른다. ‘빨래는 잘 마르겠군.’ 주인 여자는 거슬릴 정도는 아니지만 눈에 띌 만큼 훌륭히 화장한 얼굴이다. 또 내 귀에만 들리는 독백이 흐른다. ‘화장을 스물네 시간 뒤집어쓰고 살 수는 없을 텐데…’ 어느 노인의 말이 떠오른다. 유난히 화초 가꾸는 일을 좋아했던 노인이다.

“화장이 짙은 여주인이 돌보는 꽃가게에서는 화초를 사지 말게.”

“왜 그렇습니까?”

“자신을 가꾸는데 바쁜 이가 화초를 돌보는데 정성을 들이겠는가?”

“잘 알겠습니다.”

열대어 가게의 한쪽 벽에는 특이하게도 세계 특정 지역의 일주일간 날씨를 보여주는 전광판이 붙어있다. 아마도 열대어가게에서 파는 열대어들의 원산지를 골라낸 지역의 일기예보일 것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킬리만자로는 이번 주 내내 소나기다. 만년설 아래로 쏟아지는 소나기의 모습이 궁금하다. 소나기라면 안개에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대기를 점령한 물방울들이 하늘을 가릴 만큼 거대하고 촘촘하게 쏟아져 내릴 것이다. 스콜이 뿜어내는 빗물 알갱이들은 잠시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가릴 테지만 곧 쏟아져 내릴 뜨거운 태양이 대지의 옅은 물방울들을 하늘 높이 날려버리고, 하늘에 뜬 무수한 빗물 알갱이들은 결국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살찌울 것이다. 킬리만자로의 소나기와 킬리만자로의 대지와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은 일주일 내내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부웅… 어디선가 급하게 날아온 광풍 한 자락이 몽상을 방해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금세 먹구름이 자욱하다. 물고기 구경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땅바닥에 드리운 그림자의 농담을 확인하지 못한 탓이다. 눈이건 비건 일단 쏟아질 게 확실하다면 어서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 전철 역사로는 가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지난밤을 신세졌던 강으로 이어진 터널이 가장 좋을 것이다. 나는 수족관을 향해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거꾸로 걷는다. 또 한 번의 광풍이 골목 안 구멍가게에 걸린 차양을 찢을 듯 때리고 지나간다. 기왕 내릴 거라면 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올 겨울에는 유난히 비가 잦다. 눈이 ‘냉장’의 느낌이라면 겨울비는 냉동 중에서도 ‘극한(極寒)’의 상태다. 물 덩어리에서 물방울로, 물방울에서 포말로 변한 물의 원자는 촘촘하게 짜인 두터운 겨울옷과 바삭 하게 마른 피부를 뚫고 들어와 빠르고 깊게 몸을 얼리고, 날이 누그러진 후에도 쉽게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는다. 저 멀리 조금 아까 가정통신문을 읽던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땅바닥에 두고 온 가정통신문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모양이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길 위의 삶을 사는 사람은 몸이 가벼워야 한다. 그러므로 우산 따위가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겐 비가 반가울 리 없다. 외투 깃을 당겨 머리 위로 끌어올린다. 킬리만자로의 소나기 소식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곳엔 뜨거운 비가 내릴지도 모른다. 툭. 툭. 외투를 때리는 오늘의 비는 평소와 달리 무게부터 육중하다. 물방울이 아니라 모래알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느낌이다. 이런 비라면 곧 우박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마침 생선가게 앞이다. 나는 잽싸게 생선가게의 차양 아래로 몸을 피한다. 갈 곳을 정하는 데는 채 일이 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잠시만 생선가게 처마 신세를 지자하고는 피난처를 떠올리기 위해 명상에 잠긴다. 명상… 명상… 피난처… 엉덩이가 차갑지 않게,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쭈그리고 앉을 자리가 있다면 더 없이 좋을 곳. 아래턱에 잠깐 힘을 주는 사이에 입술이 터진다. 비릿한 핏물이 맺힌다. 피를 핥아 꿀떡 삼킨다. 생선가게 앞에서 맛보는 내 몸의 피. 비린내. 명상을 방해하는 작은 울림이 들린다. 똑. 똑. 똑. 빗소리는 분명 아니다. 가볍지만 자주 들을 수 없어서 기억에 각인되지 않는 소리. 똑. 똑. 똑. 똑. 동, 서, 남, 북… 방위를 인지하는 것은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소리는 내 뒤통수 쪽에서 들려온다. 고개를 돌린다. 생선 굽는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남자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주변이 적막해진다. 빗소리도 잠시 고요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왜? 라는 메시지를 눈동자에 담아 보낸다. 죽은 이에게는 사망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산 자에게 삶이 낯설지 않고, 생선을 구우며 평생을 보낸 이에게 불에 그슬린 생선의 눈깔이 낯설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남루한 차림의 거리의 사내를 향해 그윽한 눈동자로 창문을 노크하는 남자는 조금 낯설다. 다행히 그의 시선에서는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들을 바라볼 때 담아 던지는 비열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 생선 굽는 걸 배웠을 땐 생선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타버리면 못 파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생선 굽는 동안 잡생각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 구경도 하고 그럽니다. 여유가 생긴 거죠. 오래 했으니까요. 아저씨 지나다니시는 거 자주 봤습니다.” 남자가 먼저 입을 연다. 하긴 내가 먼저 말문을 틀 이유가 없다. 주방 앞에 선 남자의 손이 분주하다. 음식이 나오는 선반 위에 반찬통들이 횡대로 가지런히 놓여있고, 남자는 커다란 접시 한 장을 들고 반찬을 그득히 주워 담는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살다보면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정해진 시간과 자리에 출발선이 그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남자가 담아온 반찬과 밥과 생선. 나는 무엇부터 먹어야 하는가.


“어머니가 저를 가지셨을 때도 주구장창 생선만 드셨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태어나서 이 나고 나서부터 생선을 먹었고, 팔뚝에 힘들어 갈 무렵부터 생선을 구웠습니다. 파는 생선 먹는 게 지겨워지면 산지에 전화해서 못 먹어본 생선이나 특이한 먹을거리 있나 물어봐서 식구들끼리만 따로 먹기도 했습니다. 삭힌 홍어 구워 먹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특이한 맛입니다.” 남자의 표정만으로도 어디선가 찝찌름한 홍어향이 배어 오르는 듯하다. 한겨울, 연탄아궁이에서 갓 내놓은 연탄재 위에 오줌을 누면 오줌지린내가 연무를 이루며 피어오르곤 했었다. 오줌을 불에 굽는 냄새와 똥을 불에 굽는 냄새는 어떻게 다를까? 삽시간에 똥통에 빠진 듯 지옥 같은 황홀경을 선사할 법하지만 어느 쪽도 구미를 당기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참 인연이 신기한 게요. 우리 임자가 생선을 못 먹습니다.” 수줍게 웃는 남자의 음성이 어린아이의 미성으로 돌아간다. “만난 것도 신기하게 만났지요. 생선 공부하러 다닌답시고 내륙이고 해안이고 할 것 없이 미친놈처럼 돌아다닐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부터 벌써 생선이 제 인생이었으니까요. 회 좋아하는 사람들이 봄 도다리, 여름 민어, 가을 전어, 겨울 방어 해가며 회 먹으러 다닐 때 저는 화로랑 숯 메고 다니면서 죽어라 구이로만 맛을 봤습니다. 사실 계절 생선회 맛있다는 건 호사가들의 입담이죠. 사계절이 닳도록 같은 회를 먹어봐야 어느 계절에 최고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거니까요. 저는 이제 회가 아니라 고래도 한 마리씩 사다 먹어도 될 만큼 돈을 벌었지만 지금도 회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참, 집사람 만난 얘기를 하려다가 그만 갓길로 샜네요.” 생선 굽는 남자의 얘기를 듣고 있던 중에 문득 한 여자가 떠오른다. 가슴은 늘 슬픔으로 먹먹했고, 자신을 묶고 있는 사슬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큰 가슴과 가느다란 팔뚝을 가진 차가운 미모의 여자다. 그녀는 입버릇처럼 죽은 후에야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고 말했었다. 그녀가 잠긴 무덤 속은 견딜만할까.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 그녀의 부음을 전해 듣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무덤 속에 있을 것이다. 무덤 속에서 가쁘게 호흡하며 살아있을 것이고, 아마도 아직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폭풍처럼 쏟아져 내리던 빗발의 숨이 잦아들면서 가게 밖 차양의 연주가 가느다란 소리로 변하자 슬슬 생선 굽는 남자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사내는 울적한 날씨 탓에 점심과 저녁 피크 사이의 한적한 휴식시간을 심심하게 보내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쉰내 나는 공짜 손님 한 분 불러들여 대접하면서 나는 너에게 밥을 주니 너는 내 심심한 인생이 내뱉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나는 생선 굽는 남자의 이야기가 귀에 들리기까지 생선뼈로 우려낸 육수 한 잔을 들고 멍하니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봄부터 조개를 팔아볼까 합니다. 조개가 종류는 다양해도 맛이 비슷비슷한 놈들이 많거든요. 그래도 조개껍질 무늬 봐가며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지라 제가 아는 조개는 들일 수 있는 대로 다 들여오려고 합니다. 골뱅이, 바지락, 키조개, 칼조개, 개조개, 돌조개, 참조개, 웅피, 대합, 명주조개, 가리비, 민들조개, 홍합에 비단조개까지요. 요즘은 냉동기술이 발달해서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게 많아졌어요. 한여름에도 석화를 먹는 세상이니까요. 시험 삼아 냉동조개 취급하는 데서 시켜 먹어봤는데 맛이 그럴듯하더라고요. 생선구이가게에서 조개 구워 판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을 테고, 실은 생선만 굽는 게 이제 좀 지겨워졌습니다.”


남자가 조개 이야기를 꺼낼 무렵에 이미 서너 가지의 반찬이 거덜 났다. 나는 그가 조개를 팔아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조개를 굽는 일은 남자가 아니라 남자의 아내가 해도 좋을 것이다. 남자의 아내는 생선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고, 생선을 먹지 못하는 사람은 생선 냄새도 맡지 못하는 사람일 테니까. 아니면 생선가게 옆에 조개 굽는 가게를 하나 더 내도 좋을 것이다. 조개 굽는 집에는 아마도 수족관이 필요할 것이다. 조개가 가득한 수족관 위에 대로변에서 본 열대어 수족관이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개만 보고 살아야하는 삶은 무료할 것이다. 생선을 구우며 거리 풍경을 들여다보는 남자처럼 남자의 아내도 조개를 꺼내면서 열대어들이 노니는 풍경을 들여다볼 것이다. 둘 다 심심하지 않은 인생이다. 그 정도면 뭐 그럭저럭.


냄새나는 몸으로 식사를 즐긴 짧은 시간 동안의 대화 아닌 대화 끝에 남자는 마침표를 찍듯이 말했다.

“세상은 사람의 엄살을 들어주는 곳이 아니더라고요.

그걸 느낄 때마다 참 외롭습니다.”

햇볕에 말라 죽으려고 바다를 헤엄치는 생선은 없을 것이다. 가게를 나오는 순간부터 남자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남자는 매일 죽은 생선을 나르고, 죽은 생선의 눈동자를 보면서 죽음의 고독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살아생전의 고독은 때로 외로움이 아니라 충만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목전에 닥친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그 고독의 두려움에 잠식당한 눈동자를 죽음의 고독이라고 명명한다면 그런대로 잘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남자는 매일 죽은 생선을 나르고 그들의 눈동자를 보면서 고독의 충만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의 최후였던 고독의 행복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일 수백 마리의 죽음의 눈동자를 보는 일이 반복되면 그들의 고독이 두려움인지, 충만함인지, 행복인지조차 못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운 좋게 한 끼 식사를 거하게 얻어먹을 수 있었지만,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나는 골목 사이 모처의 늘 열려있는 화장실에 처박혀 먹은 것을 모두 토해냈다. 충만하였으나 곧 비어버렸다. 텅 빈 화장실에 혼자 가득 차있는 내가. 너무.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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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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