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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불면인

불면인 #17 . 아이 . 꿈-회오리


아이

“손님에게 모양을 보여주기 위해서요.

손님이 마음에 드는 모양을 선택하고,

신어본 후에 마음에 들어 하면 나머지 한 짝을 만들어요.”

“그러니까, 구두가 왜 짝짝이냐고.” 내가 다시 물었다.

“보여주기 위한 구두는 제 발 크기에 맞춰서 만들거든요.

손님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제가 신으면 되니까요.”

아이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대답했다.

“지혜롭구나.”

누군가를 위해서,

또는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재능은 하늘이 주신 선물일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는 않은.

“신발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해요.

어떤 재료로 신발을 만드는가도 중요하고,

신는 사람이 하루에 얼마나 오래 신발을 신고 지내는지도 중요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도 중요하고, 어느 계절에 신을 건지도 중요하고….”

아이는 크기가 다른 자신의 발에 맞는 구두를 직접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같은 모양, 다른 크기의 예쁜 구두를.

“제가 만든 구두는 조금 비싸요.”

“왜지?” 내가 물었다.

“두 짝이니까요.”

나는 웃지 않았다. 웃었어야 했을까?

“사실은, 두 짝이라서가 아니라 늘 짝짝이로 만들어야 해서 그래요.”

“왜 그렇지?” 내가 물었다.

“발은 모두 짝짝이예요.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에게 구두를 만드는 일은 고된 작업일 것이다. 아이는 아직 익숙한 것에 대해 게으르지 않았다. 익숙한 것에 게으르다는 것은, 참… 몹시 게으른 것이다.

“구두를 완성시키는 건 바람이에요.” 아이가 말했다.

“어째서?”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의 눈동자는 무언가를 이루고자 소원하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깊은 공허함으로 가득했다. 질긴 시간의 가죽 속에 갇혀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혹은 이루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으로 가득 찬, 인간이라기에는 그저 직립보행 하는 어린 포유류에 불과한 존재. 현재의 자신과 꿈꾸는 미래의 자신 사이에는 영겁의 시간이 존재하는 듯 느껴지지만, 그 거리라는 것이 겨우 송곳 한 방 깊게 찔러 뚫고 나가면 그만인 가죽의 두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어리고 어린 아이. 세상이 어떻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있지만 아직 눈이 어두워 꿈과 현실의 명암과 경계를 선명하게 볼 수 없는 어리석고 나약한 짐승. 아직은 세상의 탁한 공기보다는 어미의 자궁 속에 더 가까이 있는 작은 인간. 하지만 지금은 조금 가여울지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보다 더 단단한 기둥이 되어있을 아이. 인간에게 시간이란 고작 긴 바람 같은 것이고, 그것이 한때는 광풍이었더라도 언젠가는 고요히 멈추게 될 것이다.

“무거운 신발을 신고 걷다보면 제가 조금 더 진지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느껴져요.”

사춘기 아이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었다.

아이는 자신에게 동생이 있다고 말했다.

“같이 살지는 않아요.”

그건 좀 이상한 얘기다. 분명히 아이보다 어린 동생일 텐데 같이 살지 않는다니. 아이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의 배를 걷어차 유산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던 기억을 이야기해주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쏟아져 내리는 피를 보며 ‘내 동생인데…’ 라고 생각했다고. 본능적으로.




꿈 | 회오리

시초는 순풍이었다.

봄바람처럼 가늘고 여린 바람으로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이 바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루가 달랐다.

어제의 바람과 그제의 바람이 달랐고,

오늘의 바람과 어제의 바람이 달랐다.

사람들은 이 바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구름을 밀어내던 바람이 조금씩 땅 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구름을 밀어내는 바람이 얼마나 강한 것이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바람이 땅에 닿자 먼지가 일었다.

사람들은 외출하지 않았다.

사람의 자취로 들썩거리던 도시의 구석구석이 한산해졌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고 난 후에도 거리는 고요해지지 않았다.

바람은 날려 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날려 보내려고 작정한 듯했다.

많은 것들이 날아갔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사라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바람을 즐기지 못했다.

바람을 대면하는 것 자체가 이미 공포이자 저주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사람들을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데려간 것이 아니라 끌고 간 것이다.

바람은 이곳저곳에 덩어리지어 나타나서,

낫이 나락을 훑듯 사람들을 하늘로 빨아들였다.

아무도 도망가지 못했다.

탈출?

탈출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기도 전에,

백만 분의 일 초도 되지 못해 사람들은 정신을 잃고 허공을 날았다.

땅에 남은 자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동자엔 심지어 절망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바람은 그만큼 거대하고 새로운 재앙이었다.

사람들이 재앙을 관람하며 깨달은 것은 지구 종말의 모습이 상상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종말은,

인류의 부재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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