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불면인2018. 12. 22. 15:21


꿈 | 발톱


들길을 걷는 꿈을 꾼다.

고요한 바람이 불고 풀들은 고개를 숙인 채 이파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이대로,

이 산들바람을 타고 날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 순간,

거대한 송곳이 양쪽 어깨를 파고든다.

덜컥.

날카롭고 단단한 날이 뼈를 긁고 들어오는 느낌은,

썩은 생선이 품은 부패한 비린내만큼이나 선명하다.

이내 몸이 들리고 발이 땅에서 떨어진다.

날고 있다.

정말 하늘을 날고 있다.

내 살과 뼈에 꽂힌 것이 거대한 맹금류의 발톱이라 해도

날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진정 행복하다.

정말 날고 있다.

살을 파고든 매운 송곳은

살가죽의 고통을 모두 모아 쥐어짜내기라도 할 듯 매섭게 등을 움켜쥔다.

고통스럽다.

하지만 날고 있다.

나는 날고 있다.

행복하다.

죽을 듯 고통스러우면서도,

행복하다.

참 이상한 기분이다.



발견


다리 밑과 굴다리가 지겨워진 나는 높은 곳에 위치한 보금자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높은 곳…. 오랜만의 난제다. 높은 곳은 아마도 낮은 곳보다 더 추울 것이다. 바람도 몇 배나 더 거칠 것이다. 그러나 낮은 곳과 터널은 이제 이가 갈린다. 그렇게 이를 갈며 잠든 날을 셀 수조차 없다. 절기는 이미 겨울장마에 접어들었다. 하늘이 열렸고, 눈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습했고, 동시에 건조했다. 혹한과 포근한 날이 반복되었다. 사람들은 우산을 총처럼 차고 다녔다. 안개와 청명한 새벽이 밤과 낮이 바뀌듯 일정하게 교차했다. 눈과 비를 피할 수 있는 높은 곳을 찾아야했다. 바람도 피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길이 삶에게 던지는 문제는 늘 그렇듯 쉽게 풀리지 않는다. 높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은 한겨울에 해바라기 밭이나 장미터널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낡은 건물의 옥상부터 시작했다. 실패였다. 지붕도 없었고, 바람도 거셌다. 주택가 주변의 산을 뒤졌다. 누울 자리조차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산은 음식을 구할 수 있는 곳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높은 곳. 지붕이 있는 곳. 바람이 잠들어있는 곳. 그런 곳은 내가 사는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굴다리와 다리 밑을 오가며 시간을 버텨냈다. 입체 지도를 그릴 수 있을 만큼 동네 골목골목을 샅샅이 훑고 다니는 산책 역시 여전히 계속되었다.

어느 비 내리는 날, 나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우비를 발견했다. 비 내리는 날 버려진 우비라니. 슬펐다. 나는 우비를 건져냈다. 그리고 어디가 하자인지를 찾아보았다. 우비의 양쪽 겨드랑이 부분이 터져있었다. 겨드랑이가 터진 정도로 버려지다니…. 나는 우비를 입어보았다. 조금 컸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아주 훌륭했다. 나는 우비를 주운 기념으로 골목산책을 나섰다. 새 옷이라도 사 입은 듯 발걸음이 가벼웠다. 사람들에게 내게도 우비가 생겼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우비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꽤 아름답고 현란한 랩소디였다. 비의 음률을 즐기는 동안 겨드랑이 사이로 비가 새어 들어왔다. 개의치 않았다. 골목 끝을 지나 대로에 섰다.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부지런히 출근길을 나서고 있었다. 전철 역사 입구의 포장마차는 영업 준비로 분주했다. 구름 위로는 이제야 새벽 어스름이 돌기 시작했다. 날이 밝아도 세상은 어두웠다. 문득 짙은 구름과 비 아래를 여유 있게 걷고 있는 내가 낯설었다. 거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홀로 있어야 할 시간이 다시 나를 부르고 있었다. 거리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인적이 없는 곳에 서야 한다. 사람들과 세상의 모든 소리로부터 격리된 공간에 서있어야 한다. 그곳에서 비의 연주를 들으며 내 고독을 들여다보아야한다. 사냥에 실패하고 맥없이 자기 굴로 돌아가는 두더지처럼 나는 다시 골목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늘은 이 동네를 벗어날 수 있을까. 나를 홀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늘에서 내려오는 아리아는 어느새 내 몸을 ‘이 동네’의 경계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이미 내가 그어두었던 선을 넘어서 있었다. 선의 바깥 풍경은 선의 안쪽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골목과, 비슷비슷한 집들과, 비슷비슷한 가게들이 있었고,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비의 연주는 나를 한 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두 발이 움직여주는 만큼 걸었다. 발은 계속 움직였다. 발이 움직이는 만큼 나는 ‘이 동네’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긴 걸음을 마치고 내가 선 곳은 낯선 초등학교 앞이었다. 큰 대문은 육중하게 잠겨있었다. 문 너머로 운동장이 보였고, 운동장 여기저기에 빗물이 고여 있었다. 고인 빗물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그 위로 또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곳이 내가 오늘 있어야 할 자리였다. 나는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서 우비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서있어도 나를 만날 수는 없었다.

면회거절.

체온이 떨어지고 있었다. 눈을 떴으나 내가 서있는 자리는 내가 계속 서있던 그 자리였다.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스쿨버스. 샛노란 스쿨버스 세 대가 나란히 서있었다. 잠시 후 나는 세 대의 스쿨버스 중 한 버스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팔을 내밀어 첫 번째로 열어본 창문이 나를 환영해준 덕분이었다. 나는 버스의 색이 꽤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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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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