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불면인2018. 12. 25. 16:11




버스 안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비도 피할 수 있었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버스는 지붕이었고, 바람막이였다. 그리고 ‘조금’이었지만, 땅바닥보다 높았다. 마음에 꽤 드는 노란색 스쿨버스는, 내가 소원했던 것을 다 이루어주었다. 나는 덜 깬 잠에 몸을 비틀거리며 맨 뒷자리까지 걸어서 5인용 좌석 위에 몸을 뉘어보았다. 놀라웠다. 이것은 의자가 아니라 천국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천국은 멀리 있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리고 나는 곧 미친놈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래 웃었을까. 나는 미친놈처럼 웃으면서. 울고 있었다.


버스는 내게 스위트룸만큼이나 달콤한 객실이었다. 나는 운전석 옆자리의 창문을 화장실로 이용했다. 물론 소변만 해결했고, 일을 볼 때만 창문을 열었다. 운전석 뒷자리를 현관으로 정했다. 오르내리기가 불편한 탓에 길에서 서랍장을 주워왔다. 낡은 서랍장은 훌륭한 계단이 되어주었다. 드디어 나는 무언가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집이 생겼으니 살림살이랄 것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우선 눈에 보이는 대로 헌책을 주워왔다. 주로 역사서와 소설들이었다. 그중에는 수학의 정석처럼 필요하지 않은 책도 있었지만 베개로 쓰기에는 딱 알맞았다. 버려진 옷가지들을 묶어서 이불도 만들었다. 덕분에 몸이 얼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집은 많은 변화를 선물했다. 나는 더 이상 멀리 산책하지 않았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골목을 배회하거나 거리를 구경하는 것보다 한결 편안하고 행복했다. 특히 창을 통해 보는 바깥 풍경은 시간의 흐름을 잊게 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눈도, 비도, 이제는 피신을 위한 고민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낭만이 되었다. 겨울의 학교운동장은 종일 조용했다. 어느 날에는 눈이 내렸고, 어느 날에는 비가 내렸다. 맑은 날에는 잘 되지 않더라도 종일 자려고 노력했다. 운동장 풍경은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비 내리는 날이 가장 사랑스러웠다. 버스 천장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버스가 선사하는 운치 중의 백미였다. 빗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날에는 꿈조차 꾸지 않았다. 아침이 오면 나는 밤새도록 비와 대화를 나눈 것 같은 행복한 착각에 빠지고는 했다. 버스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 영혼을 메우고 있던 어두운 거품이 조금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가슴 속의 풍랑이 잦아들고, 고요가 돌아왔다. 나는 소리 내어 책을 읽었다. 그날그날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가장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자리는 모두 스물다섯 자리였다. 운전석을 포함한 모든 의자가 돌아가며 내 서재가 되어주었고, 소파가 되어주었고, 안락의자가 되어주었다. 나는 버스 안을 누비는 살아있는 유령이었다. 아무도 내 존재를 알지 못했고, 나 역시 투명인간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버스에서의 생활도 조금씩 흐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길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 가져보는 규칙적인 생활이었다. 지붕 없는 삶은 소용돌이 그 자체였다. 매일 다르게, 되는 대로 사는 것도 리듬이랄 수 있다면 완벽한 무질서가 곧 길의 리듬이었다. 길의 리듬에는 정해진 만남이나, 계획이나, 성과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족을 바라기에는 생존조차 버겁다. 이웃이나 친구도 없고, 늘 똑같은 극저온의 시선을 몸과 영혼으로 받아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버스의 산뜻한 노란색 외관과 편안하고 쾌적한 내관에 홀려 마치 버스와 바람이라도 난 듯 몹시 흥분한 인간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정착생활을 정리하자면… 그렇다. 방황이 끝난 것이다. 하지만 강이 넓어졌다고 해서 급류가 아예 끝난 것은 아니다.


조심해야할 것이 많았다. 낮에는 외출하지 않았고, 주로 버스 안에서 책을 읽거나 운동장을 바라보는 일로 소일했다. 꼭 나가야한다면 어두운 시간을 택했다. 먹을거리를 구하는 일도 주로 밤을 이용했다. 큰 용변은 가까운 빌딩 화장실에서 해결했다. 사람들의 눈이 가장 위험했다. 사람들의 몇 마디로 시작된 소문 덕분에 소중한 보금자리를 잃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이곳에서 겨울을 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가능하다면 사계절을 모두 보낼 수 있기를. 아니, 평생 이 버스에서 살 수 있기를….


버스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조금씩 바깥세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지붕과 벽과 독서와 따뜻한 잠자리가 나를 바꾸어놓았다. 움직이는 데는 게을러졌고, 나를 들여다보는 일에는 부지런해졌다. 담배꽁초를 주우러나가는 일이 귀찮아져서 담배를 끊었다. 끼니도 이틀에 한 끼로 줄였다. 몸은 마르고, 영혼은 맑아지고 있었다. 읽을 책이 떨어지면 쓰레기수거차가 돌기 전, 즉 자정 전후로 주택가를 돌며 책을 주우러 다녔다. 이사철이 아닌 탓에 책 구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더 먼 동네까지 책을 구하러 다녀야했다. 역시나 빈손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밤, 낮부터 꾸물거리던 하늘이 문을 활짝 열고 눈을 뿌리기 시작했다. 내 엄지손톱만큼 큰 눈송이들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요란한 세상은 온데간데없고 텅 빈 땅과 텅 빈 고요가 미소처럼 세상에 내려앉았다. 늦은 밤의 소리 없는 울림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다. 눈 내리는 풍경조차도 긴 이야기를 담은 한 권의 근사한 책일 수 있다는 걸 길 위의 삶이 가르쳐주었다. 나는 늦은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꿈 | 노인


식당은 무척 깔끔하다.

오랫동안 써온 나무 테이블은 낡을 만큼 낡았지만 먼지 한 알 굴러다니지 않는다.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세 개 있고,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하나 있다.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에 젊은 청년 한 명과 노인이 나란히 앉아있다.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에서는 창밖 풍경을 구경하며 식사할 수 있다.

청년은 이미 자신이 주문한 메뉴를 받아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노인은 퀭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나이 탓일 수도 있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픈 사람 같아 보인다.

노인의 얼굴은 낙엽처럼 바삭하게 말라있다.

김빠진 오리털 잠바.

솜바지.

수면양말.

조리.

그렇다. 노인은 조리를 신고 있다. 겨울옷차림에 조리를 신고 있다.

옷을 걸치고 있는 노인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옷 안에 살과 뼈가 아니라 옷걸이만 들어있지 않을까 의심스러울 만큼 볼품없다.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 세 개는 비어있다.

그런데 이 노인.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아무튼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에는 청년 한 명과 노인이 나란히 앉아 있다가,

이제는 마른 노인 하나만 앉아있다.

이 식당은 동네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다.

메뉴는 딱 두 가지뿐이다.

우동.

만두.

잠시 후,

예쁜 주방 모자를 쓴 아가씨가 쟁반을 들고 홀에 나타난다.

주방 입구부터 노인이 앉은 2인용 테이블까지는 약 열 걸음 정도.

우동은 사기그릇에 얌전히 담겨있고,

만두는 찜통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노인은 식탁에 놓인 우동과 만두를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것 참 묘하다.

김의 정체라는 건 결국 수증기일 뿐인데,

맛이 전해진다.

노인이 젓가락을 들어 만두 하나를 집어먹는다.

우동 국물을 한 숟가락 뜨고,

우동 면 몇 가닥을 집어먹는다.

노인은 말없이 맛있게 우동과 만두를 즐긴다.

홀에는 노인밖에 없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다가,

노인이 우동 면을 집어 들면 곧 ‘후루룩~’ 소리가 난다.

노인은 아주 느리게 식사를 즐긴다.

젊은이라면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식사를 무려 10분이 넘도록 부여잡고 있다.

드디어 식사가 끝났다.

노인은 음식 값을 치르고 식당 문을 나선다.

조용히 노인의 뒤를 쫓아가본다.

노인은 누군가의 눈이 당신을 쫓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눈치다.

마른 몸치고는 잘 걷는다.

게다가 꽤 오래 걷는다.

멀리 걷는다.

걸음걸이는 몹시 느리다.

추격은 곧 지루해진다.

이쯤에서 그만둘까?

하지만 노인이 대로를 등지고 골목길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는 생각이 바뀐다.

왠지 곧 노인의 행보가 끝나고 목적지에 닿을 것 같은 느낌이다.

느낌을 믿어보기로 한다.

헤매기라도 하듯 이리저리 골목길을 돌고 돌던 노인이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다.

무진장 넓은 마당이다.

너른 마당을 한참 질러가던 노인이 차에 오른다.

마당에서는 아이들이 한가로이 공을 차고 있다.

차에 오른 노인이 차창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샛노란 색깔의 스쿨버스다.

사랑스런 색을 가진 스쿨버스다.



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