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불면인2018. 12. 29. 21:58


생일


빈속이지만 빵도 물도 먹히지 않는다. 긴 잠을 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몇 시쯤이나 되었는지, 아침인지, 오후인지도 알지 못한다. 바깥은 아직 밝다. 꿈을 꾸면서도 내내 고민했다. 누군가가 나를 내보낼 때까지 이곳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내가 먼저 나갈 것인지. 내가 먼저 나가는 쪽이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은 가능한 한 오래 이곳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 정신을 차리고 해의 방향을 보니 오후인 것 같다. 나는 일단 상황이 발생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쫓겨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쫓겨날 때까지는 편안한 마음으로 평소처럼 지내자. 나는 일단 현관을 나와 물을 길으러 나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물을 구한 후에는 집으로 돌아가서 식사를 해야 한다. 먹고 몸을 추슬러야 한다. 그래야 다시 길에 적응할 수 있다. 나는 늘 물을 받아오는 건물의 화장실에서 가져간 통 한가득 물을 채운 후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채 넉넉히 물배를 채웠다. 그리고 곧 인적이 드문 골목에 자리를 잡고, 쪼그리고 앉아 품속의 빵을 꺼내먹었다. 나온 김에 먹을거리도 구하기로 했다. 학교 주변의 주택가에는 아파트도 고층빌딩도 없다. 대부분 2층이거나 단층의 단독주택들이다. 이곳에서는 음식을 구하기가 어렵다. 음식쓰레기 봉투 안의 음식들은 이미 썩었거나, 썩어서 아예 물이 되어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로 나가야한다. 편의점과 식당과 빵가게 뒤편을 뒤져야 한다. 나는 대로변 방향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따라 걸었다. 골목은 조용하다. 집을 돌보는 사람들은 집안 정리를 마치고 낮잠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도 오랜만에 잠이 들었다. 짧은 골목들을 지나 긴 골목 안으로 들어선다. 대문 앞마다 크고 작은 쓰레기봉투들이 놓여있다. 나에게는 큰 소용이 되지 않는, 말 그대로 쓰레기들이다. 긴 골목의 끝집 앞에 작은 상자가 놓여있는 것이 보인다. 작은 상자지만 인력을 지녔다. 상자가 인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나는 상자와 조금씩 가까워진다. 자주, 혹은 가끔 보았던 모양의 상자다. 사람들이 반가워하는 상자다.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저것은… 그렇다, 케이크 상자다. 상자 안에는 핥아먹을 수 있는 무엇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주위를 살핀 후 잽싸게 상자를 들고 걸어온 길을 따라 그대로 골목 안으로 돌아간다. 기다릴 틈이 없다. 나는 걸으면서 상자를 열어본다. 세상에나… 반이 넘는 분량의 케이크가 남아있다. 나는 케이크 받침을 꺼내어 상태를 확인한다. 조금 묵은 듯해 보이지만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케이크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집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한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길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모두가 사라져버린 골목이다. 버스로 돌아오기까지 나는 단 한 사람과도 마주치지 않는다.


케이크를 앞에 두고.

나는 오늘을 내 생일로 정하기로 결정한다.


날짜는 모른다. 요일도 모른다. 쾌적한 집이자 버스 안에서 나는 혼자 생일축하 노래를 부른다. 나를 위한 생일축하 노래. 버스 천장을 따라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는 같은 노래를 두 번이나 더 부른다. 따스한 햇살이 운동장 위로 가라앉는다. 노래를 마치고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문다. 맛있다. 아주 맛있다. 아껴 먹으려고 노력해봤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삼분의 일이나 먹어치워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노을이 운동장을 물들인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누군가 나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이 왜 불안해야 할 이유가 될까. 나는 불안한 마음을 놓아주기로 한다. 내쫓길 날이 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자연스레 내쫓기면 된다. 그리고 늘 그래왔듯 거리로 나서면 된다. 어차피 길이 내 지붕이자 침실 아니었던가. 남은 케이크를 정리해두고, 침대 위에 눕는다. 버스 안으로 붉은 빛이 번진다. 마치 태양이 그대로 줄어들어 버스 안으로 들어와 빛을 내뿜고 있는 듯하다. 오늘은 내 생일이기로 한 날이다. 그리고 고맙게도 나는 지금 태양의 축하를 받고 있다.




꿈 | 낚시


배가 출렁거린다.

바다에 비해 배가 너무 작다.

뒤집히지 않는 게 다행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아도 너무 작다.

물고기 몇 마리 잡자고 포경선을 빌릴 노릇은 아니지만 말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런 풍랑에서는 입질이 와도 알아챌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은 방어를 노리고 나왔다.

대방어가 낚이면 좋겠지만 이런 날이라면 고기를 낚기는커녕 고기밥이 될 신세다.

날씨가 이러니 당연히 작황이 좋지 않다.

부시리 서너 마리를 건진 것이 전부다.

방어도 전갱이 과고 부시리도 전갱이 과인데 왜 부시리만 잡어 취급을 받는지 모를 노릇이다.

큰 파도가 갑판을 덮친다.

정확히 말하면, 배 전체를 덮친다.

일단 몸의 균형을 잡은 다음 낚싯대를 추스른다.

낚싯대 중 하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구름은 점점 무게를 더해간다.

비까지 내리면 정말 끝장이다.

철수해야 한다.

이대로 버티다가는 배가 뒤집힐 수도 있다.

나는 선장에게 회항 사인을 보낸다.

기다렸다는 듯이 배가 뱅그르르 돌아간다.

선장은 이 와중에도 허허 털털 웃고 있다.


항구까지는 30분 거리.

배의 엔진이 힘차게 돌아가고,

뱃머리는 항구 방향으로 돌진한다.

그런데.

그런데…?

30분이 넘었을 텐데 항구의 꼬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일일까?

선장과 나는 배의 좌우를 살핀다.

파도의 고저와 해류의 흐름을 읽어본다.

엔진은 터질 듯 돌아가는데 배가 움직이지 않는다.

낚싯대.

아까 그 심상치 않았던 낚싯대.

그렇다. 뱃머리를 돌리기 전에 낚싯대 하나의 느낌이 이상했다.

나는 조타실을 나와 낚싯대를 살펴본다.

배는 리드믹컬하게 널을 뛴다.

몸이 우르르 솟아올랐다가 푸르르 가라앉는다.

배가 솟아오를 때마다 빈 낚싯대를 걷어 올린다.

낚싯대 하나에는 분명 무언가가 걸려있다.

낚싯줄은 대방어 이상의 대형어를 잡을 만큼 충분히 질긴 놈이다.

마지막 낚싯대는 거두지 않는다.

선장에게 사인을 하고 배를 돌린다.

배는 이제 항구 반대 방향으로 달린다.

엄청난 속도다. 파도가 쉴 틈 없이 갑판을 때린다.

물고기가 배를 끌고 있다. 가속도가 붙을 지경이다.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놈의 턱에 미늘이 제대로 걸려있다는 것과,

놈이 거대하다는 것.

비가 내린다.

이제 하늘도, 허공도, 바다도 모두 물의 세상이다.

그리하여 곧 물과, 물고기와, 사람의 사투가 시작된다.

우리는 배를 다시 항구 쪽으로 돌리고,

낚싯대에 두 명의 사람을 붙였다.

몸을 단단히 고정하고,

대가 부러지지 않도록 힘의 강약을 조절하며

두 사람이 교대로 낚싯대를 부렸다.

놈은 배가 서 있었던 지난 30여분 동안 꽤나 힘을 뺀 모양이다.

배가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고,

낚싯대를 부리는 사람들은 각자가 지닌 최고의 실력으로 힘을 조절했다.

놈은 배가 항구에 닿을 때까지 바다를 향해 헤엄쳤으나

결국 인간들에게 패했고, 곧 뭍으로 그 몸을 드러냈다.

놈의 정체는 어린 밍크고래였다.

우리는 잠시 머리를 맞대고 놈의 거취에 대해 의논을 나눴다.

우리가 의논하는 동안 경매꾼들은 이미 고래의 몸값을 매기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어린 고래는 바다로 돌려보내졌다.

우리 중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선장의 집 마당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잡아온 부시리로 회를 뜨고 매운탕을 끓였다.

장작불 앞에 앉아 젖은 몸을 말리며 먹는 회 맛은 일품이었다.

우리는 폭풍우에서 살아 돌아온 것을 감사하며 밤이 깊도록 축배를 들었다.



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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