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불면인2019. 1. 1. 13:26




바람


밤이 깊어서야 잠에서 깨었다. 바람소리가 나를 깨웠는지도 모른다. 바람이 신들린 듯 춤추는 밤이다. 몽롱한 의식과 함께 바람소리를 따라 흘러간 세월들이 하나둘 깨어난다. 후회로 가득한 세월. 바람이 차창을 때린다. 버스가 흔들린다.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것 같다. 검고 거센 밤이다. 책을 읽고 싶다. 하지만 오늘처럼 어두운 밤에는 몽상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촛불이라도 켤 수 있다면 좋겠지만 초가 있더라도 불을 켜지는 않을 것이다. 암흑 속에서 몽상의 숲을 헤매며 어둠이 쓰러지고 빛이 일어날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자, 이제 무엇을 몽상할까. 몽상이 아니라 회상이어도 좋을 것이다. 그래 회상…. 구정물 같은 과거. 분뇨처럼 냄새나는 그 지저분한 과거. 나는 몽상도 회상도 포기한다. 거친 바람소리. 오늘밤에는 바람소리를 듣기로 한다. 오늘의 바람에서는 황폐한 사막의 모래 냄새가 난다. 상처 입은 심장의 불규칙한 울림도 들린다. 오늘의 바람은 말이 없다. 그는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내 영혼의 힘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고 있음이 느껴진다. 젖은 낙엽 냄새가 올라온다. 흙먼지 냄새가 그 뒤를 따른다. 바람의 흐름에서 번민이 느껴진다. 숨결에서 슬픔이 느껴진다. 바람은 바다에 잠겼다가 나오기라도 한 듯 서늘하게 젖어있다. 오늘의 바람은 벽을 만나도 멈추지 않는다. 자학이라도 하듯 이 벽, 저 벽을 들이받는다. 바람의 마음에서 오래 묵은 고통의 더께가 느껴진다. 바람에게 묻는다. 당신은 가장 자유로운 존재이지 않은가. 당신은 바람이지 않은가. 당신은 그물도 뚫고, 낚싯바늘에도 걸리지 않는 존재 아닌가. 대체 어디를 날다가 슬픔의 덫에 걸린 것인가. 바람은 한동안 말이 없다. 이대로 잠든 것인가. 그대로 날아가 버린 것인가. 아니면 땅속으로 가라앉은 것인가. 귀를 열고 바람의 발자국소리를 쫓는다. 잠시 후 바람이 누군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이름이다. 누구의 이름인지는 알 수 없다. 어디선가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과거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잘 맞는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맞아 들어갔다. 나는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4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열심히 일했고, 열심히 마셨고, 열심히 돈을 썼다. 그래, 이제는 잠깐 쉬어도 좋을 시기다. 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일할 때처럼 열심히 쉬기로 했다. 나는 주로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고요했고, 평화로웠고, 게다가 봄이었다. 찬란한 오월의 빛이 온 세상을 차별 없이 비추는 계절.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놀이터에 나갔고,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고, 작은 내 방에 돌아와서는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썼다. 가끔 문예지에 글을 보내보기도 했지만 실리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 재능이 아닌 것은 돈으로 바꾸지 못한다는 걸 가르쳐주는 햇빛 찬란한 오월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이 가지는 첫 휴식을 오월에 시작한다는 게 얼마나 근사한가라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삼 일이 멀다 하고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오월의 태양 아래에서는 배고픔도 종종 잊을 수 있었다. 태양의 힘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말라버린 통장도, 끝나지 않는 굶주림도, 희망 없는 내일조차도 잠시 잊을 수 있게 해주는 힘. 생각 없이, 걱정 없이,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은 고사하고 걱정해주는 친구 하나 없이도 하루하루를 숨 쉬고 살아나가게 해주는 힘. 하지만 수시로 배고픔을 잊듯 수시로 배가 고팠다. 돼지처럼 살찐 비둘기 떼가 놀이터를 가로지르며 한가롭게 산책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땐 차라리 굶주린 인간보다 살찐 비둘기가 되고 싶었다. 그렇다. 배가 찢어지도록 먹어도 배가 찢어지지 않는 오동통한 비둘기. 더 이상 살가죽의 탄력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살이 오른 돼지 같은 비둘기. 그리하여, 그 해 오월의 내 소원은 비둘기였다. 이제 겨우 삼십 대에 접어든 젊은 남자의 소원이 겨우 비둘기라니.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은 고사하고 오히려 나 자신을 격려했다. 그래, 비둘기가 되어라. 더 이상 살집에 눌려 날지 못할 지경에 이른 것 같아 보여도 그 어떤 새보다 더 가볍게 날아오르는, 살찐 비둘기가 되어라….




바람의 여행


바람은 오늘밤 내게 긴 이야기를 할 모양이다. 운동장의 모래알들이 구르기 시작한다. 바람은 벌거숭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이야기 속의 벌거숭이는 벌거벗은 사람이 아니라 메마른 공터와 포장되지 않은 흙길과 그곳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바람은 길 한가운데에 있는 통나무집과 그곳에 사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가난과, 가난 속에서 배울 수밖에 없는 검소한 삶과, 그의 고독에 대해서. 남자는 매우 부지런하다. 그의 일과는 일출과 함께 시작된다. 통나무집의 안팎을 청소하고, 스프와 차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한 후 일터로 나간다. 통나무집에서 일터까지는 걸어서 두 시간쯤 걸린다. 그는 일터에서 힘들게 노동한다. 그의 일은 바지선에 통나무를 쌓는 일이다. 통나무를 제대로 고정시키지 않으면 바지선의 갑판 위를 구르다가 강물 속으로 떨어진다. 물에 빠진 통나무를 건져내는 일은 통나무를 나르는 일보다 더 고되다. 일터는 일꾼들에게 한 끼의 식사를 제공하는데 그들의 스프에는 늘 고기가 풍성하다. 도축장에서 도축된 고기 부위 중에서 돈이 되지 않는 자투리 부위를 공짜로 얻어다가 스프를 끓인다. 팔리지 않는 부위지만 맛은 좋다. 남자 역시 도축장에서 고기를 얻어온다. 바지선 일이 없는 날에는 세 시간을 걸어 도축장에 간다. 조금만 얻어 와도 일주일치 식량이 된다. 그 땅의 사람들은 도축장에서 부위를 나누는 사람을 재단사라고 부른다. 그는 여러 재단사들과 친하고, 그래서 도축장에 가면 재단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가는 줄 모른다. 재단사들은 돈을 받고 팔아야 하는 고급 부위를 조금씩 떼어내어 그에게 주기도 한다. 가끔은 값비싼 소의 내장을 주는 일도 있다. 바지선 일을 마치면 그는 일터에서 다시 두 시간을 걸어 통나무집으로 돌아온다. 저녁을 먹고 책을 읽는다. 그의 유일한 낙은 산책과 독서다. 바지선 일을 택한 것도 일터까지 멀리 걸을 수 있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자주 멀리 걸을 수 있었고, 돈도 벌 수 있었다. 그는 번 돈의 대부분을 책을 사는 데 쓴다. 그의 산책길은 자연이 물려준 그대로의 흙길이다. 어쩌면 그래서 바람이 그와 그의 산책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부러지고, 먼지가 일고, 풀과 나무가 자유로이 자라는 길. 바람은 그 길에 닿을 때마다 그와 함께 산책길을 거닌다고 한다. 그 길이 자기도 마음에 든다고. 그 길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다고. 바람은 또 그 땅의 빈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곳 사람들은 몸이 아프거나 고민거리가 생길 때마다 빈터를 찾는다고 한다. 텅 빈 땅의 한가운데에 앉아 몸이 낫기를 기도하거나, 모래알을 세면서 마음의 고민을 다스린다고 한다. 바람은 그들의 삶을 두고 현명하다고 표현한다. 잘 배운 이도 없다. 고민을 상담해줄 이도 없다. 병원도, 의사도 없다. 현대문명의 울타리 바깥에 존재하는, 포장된 길을 찾을 수 없는 벌거벗은 땅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대로 삶을 대면하고, 문제를 헤쳐 나간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의 생각에 동의한다. 바람은 벌거숭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며 행복과 행복에 닿는 길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행복… 나도 그것을 얻고 싶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 나는 바람에게 왜 당신은 그렇게 좋은 곳에 다녀와서 이렇게 우울해하는가를 묻는다. 당신 때문이라고. 바람이 대답한다. 당신 때문이라고.



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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