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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불면인

불면인 #26 . 꿈-검은 비



꿈 | 검은 비


“쏟아진다!!”

누군가 소리쳤다.

언제부터 하늘이 검은 비를 뿌리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아주 오래전부터일 것이다.

검은 비는 인류를 두 부류로 나눠놓았다.

비를 맞고 살아야 하는 자와, 비로부터 보호받고 사는 자.

비로부터 보호받는 자들은 빗방울이 땅을 적실 수 없는 곳에서 살지만,

애석하게도 그곳은 지상이 아니라 땅 아래였다.

비를 맞고 살아야 하는 자들 중 누구도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시장을 걷고 있었다.

느닷없이 쏟아지는 비에 당황할 법도 하지만,

시장 골목에서는 피할 곳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몇몇 상인들은 밖에 내놓은 물건들을 안으로 들여놓느라 분주했다.

나는 가까운 정육점 안으로 들어가 도마 앞에 놓인 테이블에 자연스레 앉았다.

직경 5미터가 넘는 도마 위에는 소 반 마리가 통째로 놓여있었다.

“오늘 들어온 거요.” 주인이 말했다.

“좋아 보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내장도 잘 팔립니까?”

“소 들어오는 날에 다 팔리지요. 등골이며, 간이며, 내장 전부 다요.

하지만 오늘은 많이 남았네요.”

나는 육회감이 있는지 궁금했다.

주인이 내 눈치를 알아챘는지 잽싸게 질문을 가로챘다.

“어제 육회감이 먼저 들어왔는데 맛이라도 좀 보시겠소?”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길게 침을 삼켰다. 얼마 만에 맛보는 육회인가.

주인은 냉장고를 열고 육회 감을 덩어리째 꺼내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어제 깍둑썰기로 몇 점 먹어봤는데 담백한 게 맛있더군요.”

주인의 채썰기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고기는 순식간에 5밀리 두께로 채쳐졌다.

“너무 많이 써시는 거 아닙니까?” 주인의 호의가 과한 듯싶었다.

“비도 내리고, 저도 같이 앉아서 좀 먹으려고 합니다.”

고기만 일 킬로그램이 넘어보였다.

배와 실파까지 넣으니 꽤 큰 접시가 육회로 수북했다.

그렇게 두 접시가 나왔고 각 접시의 고기 색이 달랐다.

“하나는 고추장 양념이고, 하나는 간장 양념입니다. 취향껏 드십시오.”

나는 담백한 간장 양념 쪽을 먼저 맛보았다.

“훌륭합니다. 단맛은 뭐로 내신 건가요?” 내가 물었다.

“친구가 전국을 돌며 양봉을 합니다. 아카시아 꿀을 수집하지요.”

고추장 양념은 조금 자극적이었지만 역시 좋은 맛을 내었다.

비는 오래도록 멈추지 않았다.

빗소리는 고왔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스산한 살풍경뿐.

우리는 애써 가게 밖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안쪽 풍경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벽에 그림 달력이라도 한 장 걸려있으면 좋으련만.

“오늘은 비가 오래 내리네요.” 주인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사람들이 외출하지 않는다.

정육점 주인뿐 아니라 모든 시장 상인들이 공치는 날이다.

비는 곧 빈곤한 하루를 의미한다.

“장마가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요.” 내가 대답했다.

옛사람들의 말로는 장마라 불리는 긴 우기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비가 먹물처럼 검게 변한 후로 우기가 사라졌다.

이유는 모른다.

육회의 맛은 빗소리와 아주 잘 어울렸다.

주인은 고기 집 사장답게 먹성이 좋았다.

우리는 금세 두 접시를 해치웠고, 주인은 새로 두 접시를 버무렸다.

“빗소리가 참 좋지요?” 주인이 말했다.

“네. 저도 빗소리를 좋아합니다.”

“조만간 가게 옆 빈 땅에 대나무를 심으려고 합니다.”

“굳이 대나무를 심으시려는 이유가 있나요?” 내가 물었다.

“숲이 좋은 것은, 비가 그친 후에도 빗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비슷한 이유로 대나무를 심으려는 겁니다.”

대답하는 주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제는 아무도 비를 반기지 않는다.

그나마 빗소리를 즐기는 것은 나와, 정육점 주인과, 이불가게 할머니 정도일 뿐이다.

정육점의 나무탁자는 낡았지만 멋스러웠다.

주인이 주워온 나무의자는 얼핏 탁자와 한 벌인 것처럼 보였다.

주인은 비가 내리는 날마다 술을 마셨지만 오늘은 마시지 않았다.

탁자 바라보기가 지루해진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거리로 눈을 돌렸다.

길 위로 검은 흙탕물이 고였다.

우리는 차양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육점 주인은 뭔가 기억났다는 듯 갑자기 일어나 고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챙겨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누군지 궁금했다. 하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주인은 30분 만에 소 반 마리의 해체를 끝냈다.

부위별로 정리를 마친 후 자투리 고기를 모았다. 상당한 양이었다.

창고에서 석쇠와 화로를 가져온 주인은 화로에 숯불을 지폈다.

고기를 구우려는 모양이다.

토치로 오래 숯을 달군 주인은 화로 위에 석쇠를 올리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네댓 점이 구워지자 주인은 내게 맛보기를 권했다.

“좋은 소가 들어온 날이군요. 역시 다릅니다.”

“자투리인데도 맛이 좋지요? 좋은 고기를 들였는데 하필 비라니…”

주인은 솜씨 좋게 고기를 구워냈다.

구운 고기를 종이접시에 담고, 참기름을 넣은 소금장도 만들었다.

“잠깐 가게 좀 봐주시죠.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주인은 우산을 받쳐 들고 검은 비 사이로 사라졌다.

어디로 가는 걸까? 내심 궁금했다.

나는 다시 느긋한 기분으로 육회를 즐겼다.

오후 3시밖에 안 됐지만 거리는 이미 어두워졌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밤이 일찍 시작된다.

나는 실내등과 간판 등을 켰다.

주인은 긴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손님은 단 한 명뿐이었다.

나는 주인처럼 익숙한 자세로 돼지 앞다리를 꺼내 찌개용으로 썰어 손님에게 내주었다.

평소 주인의 인심만큼 넉넉히 담은 고기를 보고는 손님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랜만에 밝은 얼굴을 보았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주인은 거의 두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늦게 왔으니 예의로라도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그러시죠.”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주인의 말로는,

홀로 지내시는 할머니가 한 분 있다는 거였다.

주인이 정육점을 맡기 전에 지금의 가게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던 할머니였다.

정육점을 넘긴 할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이 악화되었다.

“할머니가 고기를 좋아하세요. 좋아하시니까 고기 파는 일을 하셨겠지만.”

할머니는 비 내리는 날마다 고기를 구우셨다고 했다.

“이상하게 저도 비가 내리면 고기를 굽게 되더라고요. 손님도 없고.”

주인은 화로의 숯불을 살리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돼지고기 찌개거리 한 근 팔았습니다.” 내가 말했다.

“어허, 저 혼자 있을 땐 반 근도 못 파는데 대단하시네요.” 주인이 웃었다.

주인의 이마와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했고,

화로 안에서 은은하게 열이 오른 숯은 단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빗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빗방울의 울림은 에릭 사띠의 짐노페디를 연상시켰다.

고기 굽는 냄새가 고소하게 퍼져나갔다.

맑은 비가 내리던 시절을 상상해보았다.

쉽게 떠오르지 않는 풍경이다.

하늘에서 맑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

상상하는 것 자체로 이미 기분이 우울했다.

불가능한 것은 아예 꿈꾸지 않는 것이 좋다.

검은 비의 시기가 시작된 후 사람들이 처음으로 발길을 끊은 곳은, 바다라고 했다.

검은 구름과, 검은 비와, 검고 어두운 바다….

생각만 해도 어깨가 움츠러드는 풍경이지만,

여전히 바다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검은 비의 날에 만나는 바다의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게 했다.

그 바다에는 수평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과 하늘을 구분할 수 없는 거대하고 검은 캔버스 한 장이 펼쳐질 뿐이다.

정육점 주인은 바다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언젠가 한 번쯤 가보고 싶다고도 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바다는 내가 듣기에도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주인의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바다에 가보신 적이 한 번도 없나요?”

“물론이오.” 그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비 내리는 바다는 검습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인적이 드물어서 쓸쓸합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그래도 가끔 바다를 보러 오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아, 그래요?”

“굳이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겠지요. 분위기도 침울할 테고.”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습니다.”

나는 주인에게 수평선을 찾는 재미를 이야기해주었다.

“비가 거세게 내릴 때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가까운 것도 잘 안 보일 테니.”

“이슬비가 내릴 때는 더 어렵습니다. 안개효과랄까요?”

“그렇겠군요.”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런데 볼 것 없는 바다를 자주 찾으시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주인이 물었다.

“저는 바다가 아니라 그림을 보러 갑니다.”

“그림이라….”

“세상에서 제일 큰 그림이죠.”

주인은 잠깐 생각하는 듯 손에 턱을 괴더니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그림이 완성될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 그런가요?” 주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해변에 우산을 든 한 사람이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을 때.” 내가 대답했다.

주인은 생각에 잠겼다.

거대한 검은 캔버스 안에 우산을 쓰고 홀로 서있는 한 사람.

주인은 자신도 언젠가 완성된 그림을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검은 그림의 크기가 그쯤 되면, 왠지….”

나는 그에게 그 그림은 그리 어둡지도, 우울하지도 않다고 대답해주었다.


구름과 비가 변해버린 후로 우산공장은 검은 우산만을 만들었고,

이미 만들어둔 각양각색의 우산들은 검은 색으로 염색된 후 팔려나갔다.

사람들의 마음도 어두워졌다.

물론 잘 견디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했다.

사람들은 웃지 않았다.

집과 일터와 거리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도시는 거대한 무덤으로 변했다.

아무도 외출하지 않았다.

얼마 후 비 내리는 도시의 텅 빈 거리와 검은 바다를 즐기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모두 혼자 움직였다.

그들은 검은 세상을 즐기는 법을 깨달은 솔리스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만의 세상에 집중했고, 각자의 마음을 두드리는 어두움에 조용히 빠져들었다.

그리고 어두운 빛과 검은 비의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기상학자들은 열심히 원인을 연구했고, 종종 해결책을 내놓기도 했지만,

자연의 힘 앞에서는 모두 넌센스일 뿐이었다.

검은 세상은 때를 벗으려고 하지 않았다.

희게 변하는 것도, 맑아지는 것도 불가능했다.

세상은.

멸망해버린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