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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불면인

불면인 #3 . 고요


고요

고요와 침묵. 나는, 혹은 누구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시간과 공간에 놓여야 비로소 자신의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다. 사람과 짐승과 공장과 바퀴 달린 자동차를 비롯한 세상의 소리를 지배하는 모든 것이 정지해버리는 시간이 오고 나서야 사람은 각자의 마음이 그리는 그림을 보고, 마음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여전히 어렵고 난해하지만 고요의 시간 동안에는 보고 듣고 이해할 수 있다. 고요의 시간은 짧고 나는 쉼 없이 보고 듣는다. 때로는 시간을 벌기 위해 숨 쉬는 시간조차 아낀다. 나는 날이 밝을 때까지 마음의 바다를 항해하곤 했다. 대부분 낯설었고, 가끔은 고통스러웠고, 더러는 이해하기 힘든 그림과 소리도 있었지만 나는 항해를 멈추지 않았다. 고요의 세상은 신비로웠다. 현실이라 이름 붙여진 모든 것이 내주는 문제와 마음의 문제는 가진 색이 달랐고, 답이라고 이름 붙여진 모든 답에 대해 전혀 다른 색과 소리를 답으로 내어주는 것이 고요의 세상이었다. 나는 그 시간이 더없이 행복해서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하지만 시간은 냉정했고, 사는 동안 단 하루도 아침이 오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나는 이제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침이 아니라 태양을 기다리는 사람. 시간이 흐르고 공기가 싸늘해지면서 대기와 바람이 태양을 이겨 더 이상 태양이 그 빛으로 나의 몸을 데울 수 없는 계절이 오면 나는 덜컥 공포에 휩싸였다. ‘이제 곧 겨울이다.’라는 걸 몸이 느끼고 나면 나는 긴 두통과 오한에 시달렸다. 겨울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쉼 없이 오고 있었고, 죽음의 그늘로 뒤덮인 전장을 향해 달려가는 전사의 경직된 근육처럼 내 몸은 싸우기도 전에 얼어붙곤 했다. 전쟁을 원하는 전사가 있을까? 오직 전쟁만을 원하는 전사가 있을까? 하지만 계절은 전쟁을 치르러 오는 전사가 아니라 그저 회전하는 시간에 불과했다. 전쟁을 치르는 건 나뿐이었다. 계절은 늘 미소 짓듯 스쳐갈 뿐 그 짧은 미소에 목숨을 걸고 대항해야 하는 존재는 오직 나뿐이었다. 계절은 아름다웠지만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존재들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나는 비를 사랑했고, 바람을 사랑했고, 비와 바람을 몰고 오는 거대한 회색 구름을 사랑했다. 늦은 가을의 차가운 비와 서늘한 바람이 살갗을 때릴 때, 나는 몸을 떨고 이를 덜그럭거리며 그들에게 감사하곤 했다. 그 냉랭한 공기와 쓸쓸한 바람이 주는 극저온의 고통 뒤에 오는 행복. 내 살과 뼈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으면 싶을 만큼 춥고 고통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와 바람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었다. 오직 살아있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고통. 젖은 살갗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내 몸의 향기를 지닌 채 체온의 따스함에 밀려 포말이 되어 피어오르고, 내 몸과 영혼이 안개로 바뀌어 허공으로 흩어지는 순간에 찾아오는, 차갑게 심장을 식히는 전율과 깨달음. 그것은 독약보다 더 독한 기운으로 나를 감싼 채 놓아주지 않았고, 예외 없이 늘 무거운 대가를 요구했지만 그 결과로서 주어지는 쾌락은 늘 달콤했다.

잠시 땅 위에 몸을 누였다. 도시에서 흙의 냄새가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다. 흙과, 흙의 질감과, 흙의 체온과, 흙의 향이 그립지만,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기대하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완벽한 제로, 즉 불만족을 느끼지 않는 상태, 바로 그것이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텅 빈 공허의 상태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온전하게 홀로 내버려두지 않고 나를 반으로 갈라 반만 남은 상태에 머무르게 한다. 결국은 마이너스 오십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반 토막으로 남겨진 것을 깨닫지 못한다. 육신이 멀쩡하다고 해서 영혼까지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 대상이 무엇이건 영혼보다는 육신의 거죽으로 먼저 느끼는 것이 몸에 배어버린 사람의 삶. 신은 그곳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함정을 파놓고 그 허방을 디딘 영혼의 반쪽을 툭 잘라 가져가버린다. 나는 섬을 떠올린다. 물과 육지의 경계가 사라져버린 섬. 가려진 공간은 뭍도 물도 아닌 포말의 공간이다. 그 희뿌연 포말의 공간에서 나는 안개처럼 연약한 나의 나약함을 본다. 공동처럼 비어버린 채 채워지지 않는 굶주림과 물러서지 않는 군중처럼 단호한 추위 앞에 무릎 꿇는 나 자신을 본다. 희미한 선조차 그을 수 없는 무력한 영혼들이 부유하는 공간에서 호흡하고, 끝나지 않는 수명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마른 영혼. 포말 속에 내 영혼의 반쪽을 감금당한 채 내 육신은 땅 위에 눕고, 영혼은 땅의 냉랭함에 닿는다. 땅과 체온을 나누는 동안 가장 두려운 순간은 땅이 식어버리는 순간이다. 그것은 마치 사랑하는 자의 시신 위에 몸을 누인 것처럼 현기증 나는 아련함이자 고통이다. 땅은 영혼을 빼앗듯 체온을 가져가버린다. 곧 호흡이 마르기 시작한다. 나는 잘게 갈라진 입술을 닫고 느린 호흡으로 대항을 시작한다. 시간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느리고 느린 템포로 천천히 호흡을 잘라내고 한 토막 한 토막 나누어 숨을 쉰다.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몸이 따뜻해지고 누운 땅에 조금씩 온기가 채워진다. 영혼이 안심할 무렵, 몸의 긴장이 풀리고 눈보라처럼 피로가 몰려온다. 이제 거리는 고요로 가득하다. 깊은 고요 속에 귀가 멀고, 어둠을 좇던 눈동자 위로 암흑이 덮인다. 땅의 체온과 냄새. 깊게 내려앉은 고요가 마음을 어루만진다. 나는 곧 잠이 들고 꿈을 꾸기 시작한다. 나는 잠이 들고. 꿈속으로 가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