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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불면인

불면인 #33 . 수산시장 . 뒷모습의 여자




수산시장


뒷모습은 생애 두 번째 일을 시장에서 얻었다. 얼음을 나르는 일이었다. 뒷모습이 사는 곳에서 버스로 다섯 정거장 거리에 대형 수산물시장이 있었다. 시장과의 첫 만남은 일이 목적이 아니었다. 뒷모습은 추억처럼 샘솟는 육지와 바다의 물고기들을 만나러 갔을 뿐이다. 시장의 물고기들은 그에게 단맛이었고, 동시에 쓴맛이었다. 그리운 모든 물고기를 산 채로 볼 수 없다는 현실이 그에게는 쓴맛이었다. 수족관은 생명으로 채워지고 비워지기를 반복했다. 좌판 위에서는 죽음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를 그리움 안에서 숨 쉴 수 있게 하는 물고기는 살아서 눈동자가 움직이는 물고기들뿐이었다. 살아서 몸서리치고 파도처럼 우는 물고기만이 그에게 생명이었다. 벌집처럼 빈틈없이 들어서있는 생선가게들은 주인만 다를 뿐 모두 같은 모습이었다. 그 질리도록 판박이 같은 풍경을 그는 빠짐없이 매일 구경했다. 물고기들은 그에게 물고기의 삶과, 바다의 삶과, 사람의 삶을 반추하게 했다. 물고기는 물, 즉 바다와 이어져있었고, 물을 터전으로 삼는 모든 자연과 이어져있었고, 그 인연의 말미에서 사람과 이어져 생을 마감하는 존재였다. 뒷모습은 반년이 넘도록 꾸준히 물고기 구경을 했다. 물고기를 구경하는 동안에는 항상 침묵을 지켰다. 시장 상인들은 매일 돌부처처럼 수족관 앞에 앉아서 물고기만 구경하고 있는 그에게 ‘얼음’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상인들은 곧 그를 흉내 내는 데 재미를 붙였다. 그가 시장에 나타나면 모두들 그와 똑같이 쪼그리고 앉아 입을 꼭 다문 채 그의 얼굴을 바라봐주었다. 놀림이라기보다는 호기심과 호의의 표시였다. 뒷모습에게 끼니를 제공하는 주인들도 있었다. 그는 열심히 물고기를 구경했고, 열심히 밥을 얻어먹었다. 물고기는 그에게 음식이기에 앞서 스승이었지만,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에게는 오로지 음식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도 어쩔 수 없이 자주 스승을 날로 먹거나 구워 먹어야 했다. 스승의 맛은 은은한 담백함이거나 기름진 고소함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주 방문하는 가게가 조금씩 줄어들었고, 마침내는 서너 곳으로 축소되었다. 그가 즐겨 찾는 곳은 크고, 어종이 다양한 수족관을 가진 곳이었다. 일부러 그를 위해 여러 종류의 물고기를 사들여서 그럴듯한 수족관 풍경을 구현해내는 주인은 없었다. 팔리지도 않을 고기를 사다놓고 먹여 살릴 장사꾼은 없는 것이다. 장사가 유독 안 되는 가게가 한 곳 있었다. 그곳의 주인은 제철 횟감에 신경 쓰지도 않았고, 장사에도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관상용에 불과한 물고기를 수족관에 넣어둘 때도 많았다. 그 가게의 수족관에서는 상어도 가끔 볼 수 있었다. 뒷모습의 최종 목적지는 결국 이 가게가 되었다.




뒷모습의 여자


일터를 벗어난 그녀가 평소에 즐겨 입는 스타일이 정장이었는지 캐주얼 차림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번 만남에서는 캐주얼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한 옷차림이었다. 확실한 것은 일렁이는 파도의 스밈처럼 잔잔한 흥분 같은 것은 없었다는 것. 어쨌든 나는 드디어 그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처음인 것 같아요.”

“뭐가 말입니까?”

“당신이랑 얘기하는 거.”

“저도 그렇습니다.”

“지난 휴일에는 열다섯 시간을 잤어요.”

“긴 잠이로군요.”

“가끔 휴일에 잠을 몰아서 자는 버릇이 있어요.”

“평소에 잠을 못 주무시나요?”

“주중에는 그래요. 휴일을 기다리면서 잠을 줄이죠.”

우리는 오랫동안 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저는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면 체중이 급격히 빠집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요?”

“180센티미터의 키에 체중이 55킬로그램 아래로 내려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죠.”

“그건 좀 심하군요.”

얼핏 보기에 그녀는 많이 마른 체형이었다. 조금만 살이 붙어도 55킬로그램을 훌쩍 넘는다는 그녀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좁고 둥근 어깨였다. 살이 찌더라도 쉽게 알아볼 수 없을 몸매였다.

“어떤 계절 좋아하세요?”

“비를 좋아합니다.”

“저는 비가 내리면 종일 집에서 자고만 싶어져요. 의욕이 생기질 않아요.”

“저는 비가 내리면 외출을 합니다. 물에 젖은 풍경을 좋아하거든요.”

“대신 흐린 날은 좋아해요. 흐린 날에는 뭘 해도 기분이 좋아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의 차림새는 여전히 편안해보였다.

“생각해 보니 이상한 대답이로군요.”

“뭐가 말입니까?”

“저는 좋아하는 계절을 물었는데, 당신은 비를 좋아한다고 했으니까요.”

“비가 내리기만 한다면 어떤 계절이든 좋습니다.

봄비도 좋고, 장마도 좋고, 가을비도 좋고, 겨울비도 좋아하니까요.”

“특별히 좋아하는 계절은요?”

“가을을 좋아합니다. 가을이 짧아지고 나서부터는 더욱 좋아하게 됐죠.”

“짧아서 아쉽지 않은가요?”

“더 소중해졌으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녀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웃는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웃지 않는 얼굴보다는 웃는 얼굴이 아름다운 법이다. 하지만 내 얼굴은 좀 이상하다. 웃으려고만 하면 특유의 흉한 주름이 얼굴을 뒤덮는다. 고치려고도 해봤지만 자연스럽게 나오는 괴상한 주름은 지울 수 없었다. 평생을 뒤집어쓰고 살아야 할 인두겁이었고, 웃고 싶을 때 웃을 수 없다는 건 작은 것이더라도 역시 멍에였다. 그녀의 미소를 보면서 나는 오랜만에 행복을 느꼈다.

“당신은 말랐지만 건강해 보여요.”

“그런가요? 평소에 몸을 혹사하는 편입니다만.”

“좋지 않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처음에는 이유가 있었죠. 지금은 관성에 밀려 계속 그렇게 삽니다.”

“안 좋은 일이었나요?”

“불편한 가족사를 가졌습니다.”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겠군요.”

“제 아버지는 시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몸 파는 사람이었구요.”

“불편하다기보다는 낭만적인걸요?”

“결말이 불편합니다.”

“더 기대 돼요.”

“시간은 많으니까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남들과 자신에게 정직하게 살아온 세월의 단면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 사람이 흙으로부터 와서 흙과 함께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면, 그녀의 얼굴이야말로 넉넉하고 소박한 흙의 모성 그대로였다. 그녀의 얼굴 어디에서도 과한 어색함이나 구부러진 가식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최선을 다해온 삶 특유의 은은한 화사함을 품고 있었다.

“어떤 계절 좋아하세요?”

내가 물었다.

“글쎄요. 온도로 직감할 수 있는 계절이면 어느 것이든 좋아요.”

“특이하군요.”

“겨울에는 살이 얼어붙을 것처럼 추운 게 좋아요. 여름에는 타버릴 듯이 뜨거운 게 좋구요.”

“봄이나 가을은 어떤가요?”

“이제 봄가을은 겨울과 여름을 이어주는 계절로서의 의미밖에 없는 것 같아요.

너무 짧아서 제대로 느낄 여유가 없기도 하고.”

“사실 이제 도시에서는 계절의 의미가 없죠. 벽이나 콘크리트는 계절에 반응하지 않으니까요.”

“뜨거움을 찾아다닐 땐 여름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한 동안 더운 나라만 여행한 적이 있었거든요. 저는 더위가 싫지 않아요.”

그녀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시의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