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불면인2019. 1. 30. 19:47



얼음배달부


물고기 구경도 조금씩 지겨워지고, 물고기에 대한 명상도 마무리가 되어갈 무렵, 물고기 구경을 하는 데에 적당한 이유를 고민하던 뒷모습은 물고기의 마지막을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얼음배달부가 되기로 한 것이다. 배달은 하루에 두 번이었다. 그는 리어카에 각 얼음을 가득 싣고 시장을 돌았다. 필요한 집의 좌판에 부려두고 오면 일이 끝난다. 얼음배달이 끝나면 식사를 하고, 물고기 구경을 시작한다. 그는 이제 38호 생선가게의 돌부처가 되었다. 어느덧 상인들은 38호 앞에 앉아 하루를 보내는 뒷모습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38호의 수족관에는 갈수록 어종이 풍부해졌고, 장사는 갈수록 바닥을 치고 있었다. 장사가 되지 않는 38호 주인을 위해 뒷모습은 관상용으로 물고기를 팔 수 있는 판로를 마련했다. 상어를 사간 사람은 상어의 짝을 찾아주기 위해 다시 38호를 방문했다. 큰 물고기를 관상용으로 들이기 시작한 사람들은 대형 어종만이 주는 독특한 수족관 풍경에 매료되었고, 38호 생선가게는 부흥을 맞이하게 되었다. 38호는 결국 수산시장 안에서 유일하게 식용 물고기를 판매하지 않는 가게가 되었다.


뒷모습의 이야기는 흥미롭고 즐거웠지만 내 꿈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나는 결국 아무리 많은 꿈을 꾸어도 꿈을 제어할 능력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 | 놀이터


놀이터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사실 놀이터라기에는 너무 넓었으므로 광장이라고 해도 무방했고,

따지자면 그네나 시소 같은 몇몇 놀이기구들이 있었으므로,

분명 놀이터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곳은 광장이었고, 결국 놀이터였다.

나는 거구 둘이 앉으면 가득 찰 것 같은 작은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따분한 오후였다.

햇살은 엿가락처럼 늘어져있었다.

아무리 허리를 곧추 세워도 잠은 좀처럼 달아나지 않았다.

나는 책을 내려놓고 길게 기지개를 켰다.

낮잠을 즐기기에 가장 좋은 시간.

그래서인지 놀이터는 한가했다.

광장 가운데로 어떤 여자가 내 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목구비가 점점 커지고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가 되어서야

나는 그녀를 겨우 기억해냈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먼 과거의 일이었고,

원수라고 하기에는 안 보게 된 이유가 너무 가벼웠다.

결국 친구도 원수도 못되는 애매한 관계의 어떤 사람이랄까.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못 본줄 알았는데 제가 맞았군요.”

반가움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묻어있지 않은 음성이다.

“잘 지내셨나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무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크고 작은 구름들이 태양을 가릴 때마다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대단한 무표정이었다.

눈과 코와 입과 귀와 뺨이 단 1밀리미터도 떨리지 않는 무심한 표정.

잠시 후 그녀는 내게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오므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같은 자리에 서서 몇 분을 답답해하다가 급기야는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표정도 무너져 내렸다.

볼 살이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얼굴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곧 광장 전체를 가릴 만큼 거대해졌다.

나는 읽던 책을 손에 꼭 쥔 채 떨고 있었다.

나른한 오후의 햇볕은 더 이상 나를 비추고 있지 않았다.

나는 추위를 느꼈다.

나는 공포를 느꼈다.

거대해진 그녀의 얼굴은 작아지지 않았다.

낯빛에서는 여전히 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리도 화가 나있는 것일까.

그녀는 여전히 입술을 오므린 채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나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런 지경의 공포와 전율은 어쩌면 구약성서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이

신과 최초로 대면했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할 것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주기를 기도했다.

눈꺼풀을 덮고 있던 어둠이 걷히고 태양의 온기를 느끼고 나서야 나는 눈을 떴다.

놀이터이자 광장인 그곳에서,

친구도 원수도 아닌 그녀와 헤어진 후에, 나는 얼굴을 뒤덮은 땀을 닦아냈다.


등이 가려웠다.

외투를 벗어야했다.

나는 외투를 벗었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외투를 놓아둘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광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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