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불면인2019. 2. 5. 20:35




아베마리아


뒷모습은 38호 수족관 여자와 결혼했다. 새로 사야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새 집과, 새 살림이 있었고,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여자가 있었다. 수족관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뒷모습은 얼음 나르는 일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는 얼음배달만큼 한가로운 다른 일이 필요했다. 얼마 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초등학교 담벼락에 걸려있는 스쿨버스 기사모집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튿날 이력서를 넣었고, 다음날부터 스쿨버스 기사가 되었다. 학생들에게 뒷모습은 디제이로 불렸다. 그의 스쿨버스에서는 언제나 노래가 울려 퍼졌다. 학생들은 즐거워했고, 그 역시 만족해했다. 뒷모습은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스쿨버스 기사였다.

“일하는 동안에도 자유롭게, 그것도 큰 소리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건 무척 즐거운 일입니다.”

뒷모습이 말했다.

그는 이야기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석 아래를 뒤적거렸다. 자리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운동화 상자 하나가 들려있었다. 상자 안에는 그가 운전할 때 틀었던 CD들이 들어있었다. 대부분이 팝송이었고, 더러 이네사 갈란테나 마리아 칼라스 같은 성악곡들도 있었다. 선생이 이네사 갈란테를 뒷모습에게 내밀었다.

“아베마리아를 듣고 싶네.”

뒷모습은 키를 꽂고 버스의 시동을 걸었다. 버스에서 산 이후로 처음 들어보는 시동 음이었다. 엔진소리는 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육중했다. 아베마리아가 울려 퍼졌다. 카치니의 곡이었다. 천국에도 늦은 가을비처럼 우울한 음악이 존재한다면 카치니의 아베마리아가 아주 적절한 선곡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네사 갈란테의 음색은 카치니의 곡을 한층 더 깊게 가라앉을 수 있게 해주는 우아한 꼬리지느러미 모양의 납주머니 같았다. 우리는 몸의 모든 숨구멍과 심지어는 땀구멍마저 오므린 채 귀만 열어두었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선생의 눈은 젖어있었다. 뒷모습은 흥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오래 말이 없었다. 뒷모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곡인 줄 몰랐습니다. 아내가 들어보라며 넣어준 앨범인데, 오늘 처음 듣습니다.”

선생의 눈동자가 어둠처럼 깊어졌다.

“아내가 좋아했던 곡일세….”

뒷모습이 무언가 생각난 듯 불쑥 말을 이었다.

“저기… 여행을 떠나는 건 어떨까요? 시간은 많으니까요.”

여행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출발


물먹은 흑설탕처럼 까맣고 진득하게 덩어리진 구름은 태풍 전야를 연상하게 했다. 떠나기에 좋은 날이었다. 많은 영혼들이 세상의 여러 곳에서, 주택가와, 아파트와, 크고 작은 섬 안의 낡은 옛집과, 바다 위로 솟아오른 거대한 육지와 넓은 대지 위에서, 숲과 강과 바다 위에서,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바로 오늘 이 어두운 구름 아래에서, 생을 마감하고 떠나는 길을 재촉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어두운 구름은 모든 사람들의 출발을 축하하는 노래는 아닐 것이다. 선생과 나는 싸야할 짐이 없었다. 뒷모습은 예전의 트럭여행 때 썼던 작은 배낭을 메고 왔다. 사랑스러운 노란색 스쿨버스는 포효하는 사자처럼 길게 목청을 가다듬고 갈기를 정돈했다. 우리는 이제 떠날 준비를 마쳤다. 뒷모습이 크게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출발이다. 버스는 봄의 전령이라도 되는 듯 검은 아스팔트 위에 노란색 실선을 그으며 힘차게 바퀴를 굴렸다. 미지의 땅이, 미지의 장소에서, 미지의 밤을 준비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뒷모습과, 선생과, 나의 얼굴에는 뭉게구름처럼 미소가 떠올랐다. 뒷모습은 비틀즈의 노란 잠수함(Yellow Submarine)을 틀었다. 버스는 정말 잠수함이라도 된 듯 구름바다 속으로 사뿐히 가라앉았다.




꿈 | 산동네


나는 자주 마을을 산책한다.

어느 흐린 날에도,

어느 청명한 오늘도, 나는 마을을 산책한다.

내가 사는 곳은 가난한 이들의 마을이다.

다랑이 논처럼 야산에 층층이 지어놓은 집들의 모양새는

거대한 산성을 연상시킨다.

각각의 층 바깥쪽에는 행인들이 낙상하지 않도록

일 미터 높이쯤 되는 야트막한 담을 올렸다.

담 너머로 보이는 건너편 동네의 풍경은 고즈넉하다.

건너편 동네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다.

건너편 산은 우리 동네의 두 배쯤 컸으므로 가구 수도 두 배쯤 많았다.

저쪽도 이쪽도 이미 재개발지구로 지정된 지 오래다.

아마,

언제 헐릴지 모를 집과 마을을 가꾸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은 열심히 가꾼다.

곧 헐릴 담에 새 시멘트 반죽을 바르고,

곧 파헤쳐질 길을 매일 쓸고 닦는다.

길가에 꽃씨를 뿌리고, 빈 땅에 밭을 일군다.

언제가 되었건, 사라질 때까지는 우리 마을이니까.


5년쯤 되었나.

나는 전세 보증금 백만 원을 주고 이곳에 방을 한 칸 얻었다.

마을의 모습은 색 바랬지만 아름다운 한 장의 수채화 같았다.

그리고 그림처럼 조용했다.

나는 그 조용한 그림 속에서 살고 싶었다.

5년이 지난 지금도 마을은 여전히 아름답다.

전세 값도 오르지 않았다.

방 모양이 이등변 삼각형인 걸 빼고는 불편함이 없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주방이다.

주방은 연탄아궁이와 석유곤로가 기본 옵션인데,

나는 젊은이답게 석유곤로 대신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쓴다.

나는 이등변이 만나는 꼭짓점 부분에 티브이를 놓았다.


마을 주민은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처럼 값싼 전세를 얻어서 들어오는 젊은이들도 종종 있다.

인사를 나누고 자주 마주치다보면 어느새 친구가 되어있다.

나는 가끔 동네 어르신들께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여드린다.

어르신들 앞에서의 비행은 혼자 연습할 때보다 자연스럽고 자유롭다.

어르신들은 신기해하며 박수를 쳐준다.

구경 잘 했다며 찬거리를 싸주시기도 한다.

그런 날에는 저녁밥이 유난히 맛있다.


오늘은 우리 마을에서 유일한 아파트인 언덕 위 아파트의 일곱 살을 만나러 가는 날이다.

나는 일곱 살에게 한글과 책읽기를 가르친다.

한글을 배우는 아이들이 늘어나면 공터로 교실을 옮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파트 앞의 작은 놀이터를 교실로 쓴다.

일곱 살은 2년째 한글을 배우고 있다.

일곱 살은 아주 열심히 한글을 공부한다.

책도 똑 떨어지는 발음으로 구성지게 읽을 줄 안다.

일곱 살의 어머니는 아랫동네 재래시장 좌판에서 나물과 채소를 판다.

나는 월사금으로 일곱 살의 어머니께 채소와 김치를 얻어다 먹는다.

가끔 밭일을 도울 때도 있다.

어머니의 밭은 아파트 뒤편에 있다.

상추, 고추, 방울토마토, 감자, 고구마, 배추, 콩과 깨를 주로 키운다.

마늘과 무도 키운다.

일곱 살은 채소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채소를 잘 먹는 아이임과 동시에,

마을에서 유일한 꼬마아이이기도 하다.


언덕 위 아파트는 특유의 아름다운 패브릭으로 유명하다.

패턴은 매일 바뀐다.

아파트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매일 다른 색의 이불을 복도 난간에 널어둔다.

다른 동네 사람들도 아파트의 패브릭을 구경하러 온다.

나와 동네 젊은이들도 가끔 구경하러 간다.

우리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 멍하니 아파트를 바라본다.

아파트를 보고 있다 보면 시간이 잘도 간다.

예술적인 패브릭이다.

우리는 패브릭 위에 보이지 않는 미로를 그려놓고,

미로 빠져나오기 게임을 한다.

미로 게임이 끝날 때쯤이면 태양도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다.

시간 하나는 정말 잘 간다.


야트막한 담 길을 따라 걷는다.

담 아래로는 망초 꽃이 즐비하다.

나는 걸으면서 가끔 몸을 띄운다.

바람이 좋은 날이지만 바람이 좋다고 해서 더 잘 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나는 길에 동네 친구를 만나 인사를 나눈다.

이 친구는 얼마 전 이웃집의 밭일을 돕다가 발을 다쳐 깁스를 했다.

곡괭이에 찍혔다고 했나?

한 달은 더 깁스를 해야 한다고 했다.

아파트는 언덕 꼭대기에 있다.


기역자로 놓인 낡은 아파트 두 동.

아파트 앞 작은 놀이터 옆에는 각종 생활쓰레기들이

설치미술이라도 되는 듯 색의 향연을 펼치며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이곳도 곧 철거될 예정이지만 입주민 모두가 그대로 살고 있다.

복도 한편에 내놓은 살림살이들과,

펜스에 널어놓은 각양각색의 이불이 그려내는 색과 풍경은 마치

거대한 양탄자를 보는 느낌이다.

구슬픈 색을 품은 황홀한 무늬의 양탄자.



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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