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불면인2019. 2. 21. 18:43




야간산책


하늘이 부서질 듯 맑고 투명한 밤. 달이 그믐으로 여위어가며 암흑이어야 할 하늘색이 쪽빛으로 빛나던 밤에. 마음이 부유하듯 자꾸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야간 산책을 나선다. 나는 가끔, 아주 가끔, 길 건너편 땅으로 탐험하듯 산책을 나서는데 오늘 밤이 바로 그런 날이다. 차도의 중앙선, 즉 노란 실선 두 줄을 기준으로 이 세상과 저 세상이 갈린다. 차도의 중앙선 위로는 전철이 달리는 고가가 있다. 저 건너편 세상은 유독 밤이 어둡고 인적이 드물다. 검은 골목길을 어두운 밤에 걷는 기분은 뭐랄까. 조금 묘하다. 모두가 잠든 시간일 뿐,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은 분명 아닐 텐데, 어두운 밤의 저 세상은 마치 인간은 모두 사라지고 인간의 흔적만 남은 폐허처럼 고요하다. 그곳에는 골목의 조명이 모두 꺼진 늦은 새벽까지 문을 여는 주점이 있다. 나는 주점이 보이는 먼 벤치에 앉아 주점의 현관을 바라본다. 한여름에도 꺼지지 않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등이 주점의 문과 문 양쪽에 달린 큰 창틀을 장식하고 있다. 벽 전체가 통유리지만 안은 보이지 않는다. 한번은 늦은 오후에 우연히 주점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를 본 적이 있다. 미색이고, 키가 작고, 가느다란 종아리를 가진 여자다. 그 여자가 열쇠로 자물쇠를 풀어 주점의 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지면 몇 초 지나지 않아 가게 밖에 둘러 처져 있는 유일한 장식품인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등에 불이 들어온다. 노끈처럼 긴 줄에 매달린 작은 전구들이 켜지고, 꺼지고, 색이 바뀌기를 반복한다. 전구의 색은 몹시 촌스럽고 우울하다. 전체적으로 붉은 빛을 띠는 현관의 페인트 색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전등은 밝은 녹색과 옅은 빨간색과 옅은 파란색과 보라색으로 구성되어있다. 밝은 녹색은 소주병의 녹색과 흡사하다. 가지런히 쌓아올린 붉은 벽돌 더미 위에 녹색 크리스마스 전구를 돌돌 감아놓은 모양새다. 특히 보라색 전등은 어느 계절, 어떤 온도의 빛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보라색 홀로 개성 있게 빛난다. 불을 켜고 나면 주인은 주점 바깥에 있는 화장실의 자물쇠를 푼다. 화장실 문이 열리면서 주점은 오늘의 영업을 시작한다. 주점 안에서는 붉은 빛이 흘러나온다. 문득 궁금해진다. 저 안에서는 어떤 불이 어떤 온도로 불타고, 어떤 색의 공기가 어떤 모양으로 흐르고 있을까. 불은 늘 어둠 혹은 그림자와 함께 한다. 일렁이는 불은 나약한 빛을 만들고, 일렁이는 그림자를 만들고, 불어오는 바람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춘다. 어쩌면 저 주점 안에도 흔들리는 불이 있을지 모른다. 벽난로 속의 장작불이거나, 횃불 같은 살아있는 불 말이다. 나는 잠시 눈을 감는다. 주점에서 흘러나오는 불은 그 세기가 미약하여 내 눈동자에 불의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짙은 녹색으로 출렁이는 불의 여운. 어린아이의 볼을 감싼 홍조 같은 아름다운 빛의 번짐. 없다. 그것이 없다. 얻을 수 없는 걸 기대한 나는 역시 잘 마른 거리의 사람일 뿐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어떤 사람들이 앉아있을까. 어떤 음악이 흐르고 있을까. 바깥은 얼음처럼 차갑고, 맑고, 투명한 검은 유리 하늘이 세상을 감싸고 있는데, 저 안은 이상하게도 따뜻해 보인다. 다른 세상. 그래, 저 안에는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다. 같은 검은 유리 상자 안에 존재하면서도 이곳과 다른 세상이므로 당연히 이곳과 다른 사람들이 모여앉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볼 수는 있으나 알 수는 없는 바깥의 다른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지각할 수 없는, 내가 서있는 바로 이 세상. 얼음처럼 맑고 추운 나라. 난로와 붉은 조명과 술과 먹을거리를 앞에 두고 미모의 여주인과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 놓인 낮은 테이블에 앉아 바깥세상을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따라 나는 유독 그 사람들이 궁금해진다.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나를 궁금해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전혀 궁금해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나를 궁금해 하지 않는 만큼 그들이 궁금해진다. 어떤 사람들일까. 어떤 얼굴, 어떤 감정을 가진 사람들일까. 모처럼 바람이 자는 밤이지만 긴 시간 동안 빛의 따스함만을 보고 있자니 방이 그리워진다. 따뜻한 온돌… 문득 내가 지내온 방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단칸방을 구했던 날이 생각난다. 단독주택 2층의 작은 방이었다. 내 방 옆으로는 조금 더 커다란 평수의 방이 있었고, 그곳에는 중년의 부부와 아이가 하나 살고 있었다. 그 방에서 났던 첫겨울은 추웠다. 봄이 오고 계약을 연장해야 하는 시점에서 나는 반 지하라도 좋으니 따뜻한 방을 찾기로 했다. 그리고 부동산을 수소문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따뜻한 반 지하방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따뜻한 방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만 따뜻한 것은 아니었다. 깊은 밤이면 작은 거실로 이어지는 하수도관을 타고 쥐들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한 마리. 그 다음에는 두 마리. 아마도 가족이거나 연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방문을 단단히 닫고 숨을 죽인 채 잠을 청했다. 가끔은 적은 분량의 식량을 내놓기도 했다. 그들도 이 작은 집의 세입자가 그들을 위해 뭔가를 배려하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긴 밤 내내 주방을 뒤지는 짓은 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그들은 삼십 여분 정도 담소를 나누고, 새벽이 밝기 전에 어딘지 모를 그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어릴 적 자주 변비에 시달리던 아이였다. 늘 변을 보던 장소가 아니면 일을 치를 수 없었다. 참는 것이 병이 되어 결국 변비가 되었고, 나중에는 늘 변을 보던 장소에서조차 일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한해두해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어디에서나 물똥을 싸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마치 믹서처럼, 혹은 위나 장 대신 맷돌을 넣고 다니는 사람처럼 무엇을 먹든 물로 변신시켜 변기에 쏟아버리는 퇴보한 개량형 인간이 되어버렸다. 급한 용무를 느낀 나는 주점의 화장실 문을 열었고, 자리에 앉자마자 설사를 쏟았다. 일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고 나오는 데까지 3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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