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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불면인

불면인 #39 . 고요 . 꿈-등반



고요


귓바퀴를 따라 둥글게 귀를 파먹어 들어가던 부스럼이 어느 날부터인가 당연하다는 듯이 귓속으로 기어들어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성냥개비 모서리로 톡톡 쳐서 긁어내면 마른 부스럼 가루가 후드득 떨어졌다. 영근 감처럼 잘도 떨어졌다. 하지만 부스럼이 떨어진 자리에서는 다시 진물이 솟았고, 진물은 귀 바깥으로 흘러내리며 굳거나 귓속으로 흘러들어가서 다시 부스럼을 만들었다. 세상이 조금씩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세상이 조용해진다. 부스럼을 긁어낸 다음 날이면 세상이 조금 더 조용해졌다. 귀머거리가 되어가고 있는 걸까? 좋은 소리 듣기 힘든 세상. 귀머거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징조는 좋지 않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고요한 세상이라는 것도 꽤 매력이 있으니까. 귀가 완전히 먹어버린다면 내게 말을 걸다가 지친 사람이 “귀라도 먹은 거요?” 라며 성질을 낼 때, 정직하게 “예.”라고 대답할 수도 있을 테고.




꿈 | 등반


걸어지지 않는다.

마치 몸이 납덩어리로 변하기라도 한 것처럼 한없이 무겁다.

한 걸음을 떼는 데도 숨이 턱턱 막힌다.

누군가 나의 걸음을 방해하고 있다.

그렇다고 걷지 않을 수도 없다.

내 길을 막는 자가 동시에 내 등을 떠밀고 있다.

길은 보이지 않고 사방이 벼랑이다.

정상은 당연히 멀 것이다.

나의 시야를 에워싸고 있는 나무들은,

산 정상의 나무들처럼 거센 바람에 단련되지 않은 젊거나 어린 나무들뿐이다.

이런 식으로는 곤란하다.

시야를 놓친 인간은 곧 장님이다.

눈을 떠야한다.

무엇이 내 시야를 막고 있는지 알아야겠다.

일단 잠시 쉬기로 한다.

쌀가마니를 내려놓듯 힘겹게 배낭을 내려놓고 몸을 낮춘 후 흙바닥에 엉덩이를 붙인다.

단지 땅위에 앉는 일을 했을 뿐인데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해는 아직 중천인데 사방이 어둡다.

방향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침반의 화살침은 두서없이 이곳저곳을 마구 찔러댄다.

빛을 등진 자의 얼굴을 읽을 수 없듯이 나는 아직 빛의 얼굴을 읽을 수 없다.

나는 빛과 마주보고 서있다.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금 비켜서면 되지 않을까…?’

미련한 생각이다.

빛은 내가 굳이 피하거나 각도를 바꾸려들지 않아도 매순간 스스로 자리를 옮긴다.

빛을 대면하거나 빛과의 대면을 피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빛뿐이다.

온통 빛 천지인데도 바닥에서는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금세 몸이 굳기 시작한다.

잠시나마 함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이내 아지랑이처럼 뽀얗게 사라진다.

그 얼굴들 때문에 나는 다시 외로워진다.

눈부시던 빛이 기운을 잃어가고,

사방은 어둠에 정복당한다.

나는.

외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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