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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불면인

불면인 #44 (마지막 회) . 겨울 . 마지막 메모 . 여자의 꿈

겨울


누군가에게는 이 투명하고 냉랭한 대기가 눈부시게 아름다울 것이다. 짙푸른 하늘. 새하얀 구름. 호흡하기조차 벅찬 맑은 공기. 내게도 그렇다. 그러나 눈이 보는 계절과, 살이 느끼는 계절은, 다르다. 시간은 때로는 더디고 때로는 빠르게 흐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겨울은 사계절 중에서 시간이 가장 더디게 흐르는 계절이다. 시간과 함께 심장도 느리게 뛴다. 느리게 뛰는 심장은 그 느림만큼이나 느리게 가는 계절을 증명하고, 느리도록 느리게 내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슬프다. 추위가 다시 살을 덮친다. 누군가는 거리의 삶에서 외로울 겨를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겠지만, 내게 거리의 추위는 곧 외로움이다. 극한의 추위는 늘 극한의 고독을 몰고 다닌다. 그들은 마치 소떼와 소몰이꾼처럼 질기도록 애틋하고, 그 사이에 서있거나 누워있는 나는 이가 부스러지도록 몸과 마음을 떨어야 한다. 언젠가는 이 지옥도 힘을 잃고 누더기처럼 초라한 몰골로 사라질 거라는 희망. 그것만이 나에게는 유일한 위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때가 있다’라는 말은 얼마나 우스운가. 사람에게는 ‘날 때’와, ‘죽을 때’, ‘배고플 때’와, ‘외로울 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날 때’가 있을 뿐이다.






마지막 메모



숨 쉴 때마다 피를 토한다.

숨 쉴 때마다 피를 토하면서도…

그러나 무슨 꿀을 발라놓았는지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던져진 돌멩이처럼,

누구에게나 이런 것이겠거니. 하면서.

그 사람. 그래, 그 사람에게도.

나에게도.

나와 이어진 모든 사람.

혹은, 그 누군가에게도.

그저 이런 것이겠거니.

예전의 나에게도 이랬고.

지금의 나에게도.

또 앞으로의 나에게도 이런 것이겠거니.

하면서, 걷는 것이다.

이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정. 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사랑. 이라는 이름으로.

이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면서, 죽음이 내 육신과 영혼을 갈라놓을 때까지.

죽음이 나와 이 땅을 갈라놓을 때까지.

걷는 것이다.

이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혹시 행복이 있지 않을까.

이 뒤에는.

이 너머에는.

나를 동정하지 말라고 나에게 가르치면서.

나를 동정하지 않듯 남도 동정하지 말라고.

사랑하는 이들도 동정하지 말라고.

그렇게 가르치면서.

나도 동정하지 않고.

남도 동정하지 않고.

사랑하는 이들도 동정하지 않는 척. 하면서,

이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조금.

그래도 조금.

행복이 있지 않을까.

작더라도.

작아도.

이만큼 걸어왔으면.

그래, 이만큼 왔으니까.

이제는 행복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행복의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행복했으면 좋겠다.

조금이라도.

그냥 조금만.

아주 조금이라도.

행복했으면…

하면서,

걷는 것이다.

내가 길을 걸으며 거듭 배워온 것.

길이 나에게 가르친 것.

때로는… 행복할 수도 있다는 것.

불행보다 행복이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것.

멈추지 않고, 주저하지 않으면 오는 그것.

행복.


우리 모두는 괴물의 형상을 가졌을지 모르나.

연약하다는 것.


나는.

혹은 당신은.

나약한가.

강한가.

나약하지만 강한가.

나약하지만 괴물인가.

아니면,

그저 괴물인가?

아니면 혹시,

불행하고 나약한 괴물인가.

평생을 숨 쉬며 살아왔지만.

숨 쉬는 것이 가장 힘든 괴물인가.


봄이 왔고.

눈이 내렸다.

그 어느 해보다 따뜻한 봄이었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다.

내 안에 나를 가두는 일.

어차피 꿈속에서조차 숨을 곳 없는 인생.




그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난다.

이 긴 이야기에서 내가 한 일이라고는 잠시 그 사람을 만났던 일과, 그 사람의 노트를 옮겨 적은 것밖에 없다. 그는 이제 사라졌다. 그가 남긴 것은 늘 걸치고 다녔던 검은 외투뿐이다. 어쩌면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외투를 입지 않아도 되는 따뜻한 땅으로. 사람이 한 번도 밟아보지 않은 미증유의 대지로 떠났는지도 모른다.






여자의 꿈


물이 없는 땅을 걷는다.

걷고 걸어도 목마르지 않다.

아무리 걸어도 배고프지 않다.

바람은 따스하고 포근하다.

그 바람처럼 내 몸 역시 허기짐도 갈증도 없이 평온하다.

삶에 필요한 게 없다는 건,

더 이상 삶을 견뎌내지 않아도 될 만큼 삶과,

혹은, 삶에 가까워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불면의 밤에. 나도 그 사람처럼 내 꿈을 적어보았다.


그렇게.

겨울이 끝났다.






[불면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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