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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편] 울트라 쏠티 스토리

[초단편] 500년


인간 수명 500년 시대가 되었다. 500년의 수명을 누리는 동안 인간들은 찬란했던 과거보다 한층 더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냈다. 철학을 비롯한 모든 인문학과 과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누구나의 예측대로 죄악에 빠지는 악한 심성의 모양새와 아이디어도 기발해졌다. 범죄자들이 더욱 조직적이고 포악하게 변해가면서 죄의 대가 역시 범죄만큼이나 잔인해졌다. 형벌이 무거워짐에 따라 무기징역의 형태도 바뀌었다. 모범수로 조기 퇴소해서 남은 삶이라도 그나마 사람답게 살 수 있었던 과거의 낭만적인 무기징역 제도는 사라졌다. 500년 세대의 무기징역은 육체가 사망하더라도 전기 자극을 통해 뇌의 생명을 유지하며 몸 없는 삶으로 끝없이 징역을 살아야 했다. 그 삶에는 몸의 피로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수면의 휴식도 존재하지 않았다. 징벌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었지만, 우습게도 플러그가 빠지지 않는 한 영원히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죄인으로 생을 마감한 심판의 대상이 겪는 고통은 상상 너머의 극한의 잔인함이 되었고, 심심찮게 수정 혹은 폐지론에 부딪치곤 했다.


몸의 죽음 후에 뇌만 살려두는 기술에 대한 도덕성을 두고 인간들은 오랜 논쟁의 세월을 보냈다.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법은 이미 모든 잔인함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형벌의 개념이 아닌 경우에는 본인의 동의하에 전기적 영생을 허용했다. 뇌만 살아남는 자는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영생을 획득할 수 있었지만, 삶과 소멸은 플러그를 쥔 사람의 손 안에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뇌를 살려두고 함께 사는 일이 빈번해졌다.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고통보다 수족을 절단 당하는 고통이 더 가벼울 것이다. 작은 유리병 속의 주름진 생명은 산 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매체를 전달하는 칩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안에서 끝나지 않는 꿈처럼 세상을 만났다. 처음에는 자신의 새로운 삶을 신기해했지만, 갇힌 삶에 적응하는 과정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새로운 세상에서의 영생을 감사하는 마음도 잠시뿐, 얼마 지나지 않아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곳에서의 삶도 여전히 삶이기는 했으나 절반뿐이거나 혹은 그보다 더 바닥인 불구의 삶이었다. 만지는 행복, 맛보는 행복, 듣는 행복, 소리 내는 행복, 움직이는 행복들이 거세된 세상. 한마디로 그곳은 비어버린 낙원이었다. 유리병 속은 고독했다. 유리병 바깥세상의 사람들은 여전히 고된 일과와 피로에 시달렸고, 잔잔한 유리병 속의 세상은 잠을 자야하는 식구들을 기다리는 지루함과, 본다고 느끼지만 안개 너머로 보는 것 같은 답답함으로 충만했다. 촉각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는 교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미소나, 눈물이나, 위로 같은 가벼운 일상의 감정조차 주고받을 수 없었다. 음성 없는 텍스트가 화면에 뿌리는 글자들은 마치 인공지능의 독백처럼 무기력해 보였다. 늦은 밤, 홀로 깜박이는 커서가 지닌 생명력…….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무가치한 존재가 남기는 무음의 울음소리처럼 공허했다.


“500년이라는 시간은 사실 인간에게 지나치게 긴 세월이야, 안 그래?”

뜨거운 커피를 엉겁결에 한 움큼 꿀떡 삼킨 남자는 식도에서 고기 익는 냄새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남자는 꽤 젊은 얼굴이었다. 한 300살쯤?

“하지만 그렇게 살고도 더 살겠다고 욕심을 부리죠.” 마른 여자의 입가를 따라 잔주름이 번졌다. 4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여섯 번이나 라식을 받은 여자의 눈동자에는 다시 백태가 끼고 있었다.


여기에 아내를 끔찍이 사랑했던 남자가 있다. 오로지 혼자 남게 될 아내를 위해 뇌로만 지탱해야 하는 미지의 삶을 선택했던 그는 자신을 이제 타이핑할 줄 아는 고깃덩어리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의 몸이 사망한지 정확히 9개월하고 보름쯤 지났을 때 그의 아내는 그가 아끼던 후배와 바람이 났다. 그는 몸을 잃어버린 인간의 절대적 무가치 앞에서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몸을 잃은 인간의 삶은… 파리만도, 바퀴벌레만도, 쥐만도 못했다.


그의 머나먼 조상은 유목민이었고, 그 자신은 정착한 도기장이였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조차 유목의 습성을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았다. 평생을 떠돌았고, 이국의 거친 흙 위에 쓰러져 객사했다. 그는 조상들의 삶을 유전적 몽유병으로 치부했다. 그리고 바람 같은 삶에 종지부를 찍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의 바람기를 불로 다스리기로 결정했고, 바람을 등진 채 흙과 물과 불의 세상에 정착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육신을 벗은 후 가장 그리워한 것은 바람이었다. 수천 도의 열기로 끓어오르는 가마 앞을 떠나 잠깐의 휴식에 잠길 때마다 어김없이 불어주던 바람 한 자락, 젖은 등을 서늘하게 말려주던 바로 그 한 줌의 바람. 결국 그 자신에게도 그의 조상들처럼 바람을 사랑하는 방랑자들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살과 살가죽을 모두 잃어버린 지금, 가려운 등조차 가지지 못한 텅 빈 알갱이만 남은 그가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고민하고 있는 것은 삶을 완벽하게 잃어버리는 것, 즉 뇌를 죽이는 일이었다. 팔을 뻗어 손가락 몇 개만 움직이면 뽑을 수 있는 플러그마저 몇 만 해리 너머의 육지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가 최후의 죽음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욥은 말했다. “내 혼은 삶에 지쳤도다…….”<구약성서 욥기>. 그리고 그 역시 그랬다.


죽음을 기다리는 일은 무의미했다. 인간에게 영원이라는 시간은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었고, 그러므로 당연히 애초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영원한 기다림……, 그것은 인간의 몫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결국 수명 500년 시대는 견디기 힘든 시간의 범람에 질식사하기 전에 더 이른 죽음에 닿을 지혜가 필요한 세상이었다. 뇌만 살아있는 상태에서 뇌만 죽일 수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산 자가 혀를 깨물고 죽듯이 말이다. 그에게는 자살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는 그가 유리병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해 플러그를 빼려고 애써보았다. 하지만 애완견을 훈련시키는 일도, 플러그를 합선시키는 일도, 집에 불을 내는 일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마침내 상상 자살을 결행하기로 결심했다. 스스로를 죽은 자로 인정한 채 무한대로 주어진 시간의 늪을 유영하는 것. 그의 반응만으로는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시간이 유유히 흘러갔다. 그러나 이쯤이면 바다가 범람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에조차 아무도 그를 위해 플러그를 뽑아주지 않았다. 세상은 아낌없이 수명 500년 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집집마다 미지근한 유리병이 늘어갔다.


오늘도 그와 이어진 모니터는 변함없이 검고 고요하다. 그는 자살을 이루었을까…. 그를 담은 유리병은, 여전히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