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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5 . 초원의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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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사막은 초원으로 시작된다.


초원과 모래사막의 경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선명하다. 신의 솜씨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풍경이다. 다른 색을 가진 두 개의 사막은 강을 기준으로 갈라진다. 강은 큰 땅덩어리를 횡으로 가른다. 강의 아래쪽은 모래사막이다. 강의 위쪽은 초원의 사막이다. 강가의 모래사막도 강물에 젖어있고, 강에 면한 초원의 사막도 강물에 젖어있다. 그러나 모래사막에는 단 1밀리미터 높이의 풀도 자라지 않는다. 온전히 모래다. 초원의 사막은 강물에 젖지 않은 땅부터 풀이 자란다. 물에 젖은 강가의 모습은 모래사막과 똑같다. 완전히 똑같다. 강은 마른 땅과 비옥한 땅의 젖줄이다. 하지만 모래사막의 사람들은 절대로 이 강물을 마시지 않는다. 그들의 식수는 오직 빗물이다. 두 사막의 사람들 모두 이 강을 신성시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강은 그저 강일뿐이고, 대지를 가르는 물길일 뿐이다. 그들은 모두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로 살아간다.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고, 그 조상들의 조상들도 그랬다. 강의 너비는 70미터다. 우기에도 70미터를 넘지 않고, 건기에도 70미터 미만으로 줄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두고 사막의 사람들은 강의 신비라고 부른다. 강은 모래사막의 사람들과 초원의 사막 사람들이 대화하는 장소다. 그들은 강에 몸을 담근 채로 대화를 나눈다. 강에는 오직 성인만이 몸을 담글 수 있다. 여자들은 성인이 되면 강으로 짝을 찾으러 나온다. 초원의 사막에 사는 여자들은 모래사막의 남자를 만나야 한다. 모래사막의 여자들은 초원의 사막에 사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 짝을 만난 여자는 짝이 되어줄 남자를 자신의 사막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그와 함께 여생을 보낸다.

강은 또 고백의 장소이기도 하다. 사막의 사람들은 자신의 내적인 고통과 극한 환경이 주는 외부적 고통을 자신의 사막에 사는 이들에게 고백할 수 없다. 그들은 보통 자신의 고통을 강물에 독백하듯 고백하거나, 이웃 사막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강은 그들의 고백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통도 씻어낸다. 강을 떠날 무렵이 되면 그들 모두 자신의 고통이 무엇이었는지 잊게 된다. 그런 이유로, 이 강의 이름은 ‘잊음’이다. 하지만 아무도 강에 이름을 붙이거나 강의 이름을 ‘잊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의 세상에 강은 오직 하나뿐이고, 그들이 아는 강도 하나뿐이기에 강에 이름을 붙이거나 강을 강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강은 그저 강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