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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9 . 비... 비가 그들의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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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사막은 바다에 연하여 있다.


결국 모래사막의 두 경계는 바다와 강이다. 바다에 풍랑이 일면 모래사막에는 바람이 분다. 바다에 폭풍우가 일면 모래사막에는 비가 내린다. 모래사막에는 오늘 바람이 분다. 바람 부는 날에는 모두가 잠을 설친다. 바람이 지배하는 밤은 어수선하다. 바람이 잠들면 밤도 잠이 들고, 바람이 깨어있으면 밤도 잠을 뒤척인다. 벌써 며칠째 바람이 분다. 매일이 바람이다. 그칠 기미가 없다. 바람은 잠든 사막을 깨운다. 모래알들이 기지개를 켠다. 잠에서 깨어난 모래알들은 바람의 방향을 좇아 행진을 시작한다. 모래알들은 서로의 몸을 부비며 노래를 부른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고음과 저음을 오간다. 바람의 줄기가 갈라지면서 모래알들의 소리가 화음을 이룬다. 바람이 사막의 합창을 지휘한다. 아름답고 거친 화음이 누운 이들의 살가죽을 긁고 지나간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몸을 충분히 가릴 만큼 넉넉한 옷감을 가지지 못했다. 모래에 긁힌 상처 위에 딱지가 앉는다. 떨어진 딱지 아래로 새살이 돋고, 새살 위로 다시 상처가 난다. 그들의 몸은 사막이 선물한 비늘로 가득하다. 모래에 쓸린 아이들의 얼굴은 거칠고 창백하다. 여린 살갗 아래를 지나는 혈관은 보랏빛으로 은은하다. 아이들은 악몽에 시달린다. 아이들을 감싸 안은 어른들의 가슴에 소원이 피어난다. 비……. 비가 그들의 소원이다. 잠에서 깨어나도 눈을 뜰 수 없다. 모래먼지로 덮인 그들의 혀와 식도는 고사목의 껍질처럼 거칠게 말라있다. 태양이 솟아도 바람은 계속된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대기가 온통 황금빛이다. 백만 도로 끓는 태양의 코로나(Corona)도 바람의 길을 막지는 못한다. 모래먼지는 하루 종일 사람들의 목구멍을 넘나들며 식량을 대신하려들지만 그들은 이미 숨을 삼키는 일조차 힘들다. 아이들은 여인들의 넓고 기다란 옷자락 안에 숨어 바람을 피한다. 바람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키고 자신만의 소리로 대기를 가른다. 사람들은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를 기도한다. 바람의 길이 바뀌어 자신들의 거처와 육신을 관통하는 악의 없는 고문을 멈춰주기를. 사람들은 이제 불면의 피로와, 바람이 몰고 오는 추위와, 거친 모래먼지에 이어, 거대하게 울리는 바람의 굉음과 싸운다. 바람과의 전쟁에서 사람들의 손에 들린 무기는 유일하게 마른 두 손뿐이다. 그들은 손바닥을 펴서 엄지손가락으로는 귓구멍을 막고 손바닥으로는 눈을 감싼다. 고막을 울리던 굉음이 두개골을 울리며 정신을 멍하게 한다. 그들은 이제 고독할 틈이 없다. 그들 외의 다른 생명이 존재함을 오감이 느끼고 있는 탓이다. 그들은 눈과 귀를 막은 채 한나절이 넘도록 바람과 사투를 벌인다.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는 전쟁이다. 태양이 동쪽보다 서쪽에 더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바람이 방향을 바꾼다. 족장은 사람들을 구멍바위로 이끈다. 바람이 바위의 모서리를 때린다. 사람들은 구멍바위 안으로 들어가 둥글게 모여 앉는다. 비스듬히 불던 바람이 직각으로 방향을 바꾼다. 사람들은 이제 바위벽을 방패삼아 바람을 피한다. 한 노인이 입을 연다. “구름이 오고 있다….”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본다. 황금빛 모래먼지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여인들의 품속을 파고든다. 바람에 비린내가 스며든다. 노인의 말이 맞는가보다. 구름이 오고 있다면 곧 비가 내릴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늘 준비되어있는 그릇들을 꺼내놓는다. 바람이 잦아든다. 어디선가 쿵 하고 바위덩어리가 내려앉는 듯 육중한 소리가 울린다. 바람은 이제 완전히 멈추었다. 정확히 7일하고 반나절만이다. 아이들이 여인들의 품을 벗어나 고개를 든다. 이제 바람은 아이들의 머리카락 한 오라기도 흔들지 않는다. 금빛 먼지가 잿빛으로 색을 바꾼다. 노인의 말이 맞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구름이 오고 있다. 사위가 어두워질수록 사람들의 눈동자는 밝아진다. 모래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고 희미하게 지평선이 떠오른다. 저 멀리 힘을 잃은 바람의 꼬리가 마지막 기운을 쥐어짜며 회오리를 일으킨다. 바람은 곧 현기증을 느끼며 완전히 쓰러진다. 지평선이 선명해진다. 사람들은 이제 구름이 쌓이기를 기다린다. 켜켜이 쌓인 구름이 비를 내려주기를 기다린다. 바람이 사라지자 구름도 이동을 멈춘다. 구름은 이미 넉넉히 무거운 상태다. 사람들은 망토를 펼쳐 흙먼지를 털어낸다. 이제는 비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사람들은 구멍바위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구름을 바라본다. 풍랑 이는 바다가 대기를 적신다. 바닷바람이 젖은 대기를 사막 안으로 날려 보낸다. 뱃사람들은 갑판 위에 서서 사막 위의 하늘이 어두워지는 풍경을 바라본다. “사막에 곧 비가 내리겠구먼.” 한 선원이 독백하듯 말한다. 출렁이는 배는 회항을 준비한다. 사막의 사람들은 여전히 구름을 바라본다. 비는 아직 내리지 않는다. 사막이 젖기 전에 사람들의 눈동자가 먼저 젖는다. 입술의 튼 살 사이로 감사의 고백이 흘러나온다. 그들은 대체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 것인가. 살과 눈물의 고백은 소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소리도 들을 수 없고, 아무것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