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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19 .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것들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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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 아래는 고요한 소리의 세상이다.


비의 세상은 비의 음률이 영혼의 슬픔을 다스리는 세상이다. 물속의 세상은 조금 다르다. 물은 한없이 흐르지만 그 흐름을 소리 내지 않는다. 물속에는 소리가 없다. 아무소리도 없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침묵과 고요도 소리가 된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것들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세상. 고요하지만 분주하게 살아있는 세상. 그곳에서는 소리를 내는 것들도 소리를 내지 않고, 소리를 내지 않는 것들도 소리를 낸다. 북이나 종처럼 소리 내는 것이 존재의 목적인 것들도 물속에서는 각자 숨을 죽이고 소리 내지 않는 것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소리… 소리 내지 않는 것들의 소리…. 그 소리는 신비로운 울림을 지닌다. 아무도 그들이 소리 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당연히 소리 내지 않는 존재로 여겨진다. 그러나 소리를 낸다. 물속에서는 많은 소리가 들린다. 풀이 자라는 소리, 콩이 열리는 소리, 새싹이 흙을 밀어내는 소리, 억새가 마르는 소리, 나락이 영그는 소리, 굶주린 사자의 몸에서 새 갈기 한 올이 자라나는 소리, 인간의 머리칼이 희게 세는 소리, 별빛이 반짝이는 소리, 살덩이가 잘려나간 밀림의 울음소리, 아기의 손톱이 자라는 소리, 별이 자전하는 소리, 새의 뱃속에 든 알껍데기가 단단해지는 소리…. 그곳에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의 모든 소리 없는 소리가 들린다.


잦아드는 빗줄기 속에서 사막과 사막의 사람들이 깨어난다. 족장은 사람들을 강가로 이끌어 대열을 정리한다. 여자들과 남자들의 수를 비율에 맞추어 나누고 그들의 설 자리를 지정해준다. 사막의 사람들은 이제 강으로 들어간다. 남자들의 손에는 작살이 들려있다. 여자들은 양손으로 귀와 눈을 막는다. 족장이 강을 향해 휘파람을 불고, 여자들은 강물에 몸을 담근다. 여자들은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세상이 내는 모든 소리 중에서 그들이 찾는 소리만을 걸러낸다. 소리를 찾아낸 여자가 한 손을 물 밖으로 내밀고 손가락으로 강물 위를 가리키면 남자들은 여자가 가리킨 곳을 향해 작살을 던진다. 작살에 맞은 물고기가 작살과 함께 물 위로 떠오른다. 아직 사냥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은 강의 아래쪽에서 물고기들을 건져 작살을 뽑아낸 후 강가에 모아놓고, 뽑은 작살을 어른들에게 도로 가져다준다. 여자들은 강물이 들려주는 소리 내지 않는 것들의 소리에 귀를 막고, 강물을 밀어내는 물고기들의 지느러미 소리만을 찾아낸다. 사냥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모래사막의 사람들은 한 시간도 채 못 되어 한 달은 먹고도 남을 물고기를 사냥한다. 사냥을 마친 사람들은 잡은 물고기를 손질하기 시작한다. 물고기 손질은 어린아이와 노인, 남자와 여자의 구분 없이 모두의 몫이다. 배를 갈라 내장을 빼고 물로 씻어낸 물고기들을 성기게 엮은 배낭에 차곡차곡 담는다. 손질을 마친 물고기들은 앞으로 꽤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의 식량이 될 것이다. 빗줄기는 점점 힘을 잃는다. 늦은 오후가 되자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태양이 고요하고 은은한 빛을 내뿜는다. 사람들은 반가운 얼굴로 태양의 포근한 열기에 몸을 맡긴다. 그들은 젖은 옷을 말리고 거처로 돌아갈 준비를 서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