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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22 . 사막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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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되어버린 대지는 한때 더할 나위 없이 비옥했다. 이 대지에 최초로 안착한 인류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게 누구였든 이 땅의 비옥함은 방문자의 발을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비옥한 생명의 땅. 비와 구름과 태양과 바람 모두가 오직 이 대지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아 보였다. 대지에는 이미 충분한 과실수가 있었고, 각종 채소들이 풍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곡식을 위한 농지도 넉넉했다. 대지의 중앙에는 거대한 초록의 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초록의 산을 대지가 가진 신비의 비밀로 여겼다. 대지는 그야말로 인간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신이 준비한 땅이었다. 사람들은 대지에서 과일과 곡식을 얻었고, 산에서 물과 나물과 약초를 얻었다. 산의 계곡은 깊고 아름다웠다. 계곡에는 일 년 내내 맑은 물이 넘쳐흘렀다. 계류는 대지로 흘러들어 강이 되었다. 강과 계곡은 사람들에게 마실 물을 주었고, 산짐승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봄이 오면 대지와 산에서 자라는 모든 녹색 식물들이 꽃을 피웠다. 땅 위의 가장 작은 들풀조차 소박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대지에는 건기나 우기가 따로 없었다. 늘 필요한 만큼의 비가 내렸고, 필요한 만큼의 햇볕이 내리쬐었다. 강은 한 번도 범람하지 않았다. 산은 자신의 자리에 굳건히 서있었다. 비와 태양이 대지를 위해 존재했다면, 대지는 인간의 풍요를 위해 존재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평화만을 위한 평화가 있듯이, 단지 풍요만을 위한 풍요였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씨를 뿌릴 때부터 작물을 거둘 때까지 대지의 흙과, 초록의 산과, 비와 태양과 하늘에 내내 고마워하며 살았다. 땅과 땅의 결실은 그들의 모든 것이었고, 미려한 풍경과 온화한 기후는 덤으로 주어진 축복이었다. 행복한 대지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나고, 사막의 태동은 슬픈 전설로 이어진다. 가까운 우주 안의 아주 작은 별들 중에서도 아주 작은 별. 그 아주 작은 별이 대지와 대지의 사람들을 시기했다. 작은 별은 녹색 대지의 수장인 초록의 산에게 산과 대지를 불태워버리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선한 초록의 산은 별에게 자신을 내놓는 것으로 대지의 파괴를 막으려했다. 별의 시기심은 곧 현실이 되었다. 별은 산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크기의 운석 하나를 불러들였고, 그것은 곧 녹색의 대지를 향해 날아왔다. 운석은 정확하게 초록의 산 중앙으로 날아와 꽂혔다. 산은 박살이 났고, 거대한 바람과 불이 대지를 휩쓸었다. 대지는 불바다가 되었다. 산이 날아가 버린 자리에는 강만 남았다. 잘게 쪼개진 산의 반쪽은 바다 쪽으로 흩어지며 모래밭이 되었다. 불의 피해를 덜 입은 산의 위쪽은 초원으로 남았다. 의아하게도 대지의 사람들은 대지가 황폐해진 후에도 대지를 떠나지 않았다. 강 위에 남은 사람들은 강 위에서 삶을 이어갔고, 강 아래에 남은 사람들은 거친 사막에 남아 생존을 위해 분투했다. 그들은 깊은 화마에 신음하는 대지의 몸을 끌어안았다. 대지의 고통을 함께 느꼈다. 풍요는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언젠가 대지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거라 믿었다. 그들은 기도했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지를 떠나지 않았다. 아무도 대지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사막을 떠나지 않았다. 바람과 불이 모든 것을 앗아간 것은 아니었다. 바다에 연한 모래사막은 남은 자들에게 소금을 주었다. 그들은 정성을 다해 소금밭을 일구었고, 초록의 사막에 사는 사람들과 소금을 나누었다. 그들은 자주 강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대지가 살아나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다. 강은 오래도록 슬프게 흘렀다. 슬픔의 강은 남은 자들을 위로할 이가 자신뿐임을 슬퍼했다. 강은 홀로 남은 외로움과 고통을 한없이 흘려보냈다. 강의 슬픔은 멈추지 않았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초록의 대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막의 전설은 그렇게 끝이 난다.


이 도시는, 폭풍우만 시끄럽다. 거리를 걸어도, 골목을 헤매도, 사람들의 소리는 크지 않다. 그리 거칠지 않다. 주택가의 담은 낮다. 골목을 향해 난 창을 열어두고 지내도 사람들의 소리를 듣기 힘들다. 벽이라도 좀 소리를 내주면 어떨까 싶은 심정이다. 집에서의 하루는 독서로 보낸다. 마당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시간이 가장 편안하다. 노파와 선장 역시 종일 조용히 지낸다. 선장은 하루에 한 번 항구에 나가 바다를 바라본다. 주 메뉴는 매 끼니마다 바뀐다. 주로 고기와 생선이다. 식비와 숙박비를 내려고했으나 정중히 거절당했다. 정 무료할 때는 골목을 산책한다. 긴 미로의 산책은 지루할 틈이 없다. 인적 없는 골목을 걷는 기분은 마치 깊은 숲 속에 숨어있는 정갈한 오솔길을 걷는 기분이다. 골목풍경은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하다. 걷다보면 이곳이 사람들이 사는 곳이 맞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가끔은 끊어지지 않는 정적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디선가 불이라도 난다면 동네 하나가 통째로 불타버릴 것이다. 이 동네는 불이 나도 조용히 불타오를 것 같다. 여전히 사람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 같다. 소방차도 오지 않을 것 같다. 조용히 불타고, 조용히 폐허가 될 것 같다. 아주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올 것 같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폐허 위에 누워 잠을 청할 것 같다. 그리고 비가 내릴 것 같다. 추적추적 비가 내릴 것 같다. 화마가 지나가고 폐허마저 쓰러질 날들이 오면 골목은 더 조용해질 것이다. 정적은 더 견고해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적보다 집들의 대문이 더 견고해 보인다. 단단한 견고함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집집마다 열고 들어가서 마당을 구경하고 싶다. 낮은 담을 두른 집을 만날 때마다 담 너머로 안을 들여다본다. 집은 작아도 마당은 꼭 있다. 마당마다 다른 종류의 화초들이 자란다. 작지만 하나같이 곱다. 어느 집을 들여다봐도 사람의 모습을 찾는 것이 힘들다. 백 년이 지나도 별로 변할 것 같지 않은 동네. 백 년 후의 산책에서도 비슷한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동네. 나는 이 정적의 미로 속에서 걷는 법을 배운다. 어떻게 걸어도 소리 내지 않는 고양이의 걸음처럼 살살. 시선을 돌릴 때도 느리고 조용하게. 팔 흔드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양손은 꼭 주머니에. 집에는 사람이 없다. 골목에는 소리가 없다. 소리 없는 골목을 소리 없이 걸으면서 사막을 상상해본다. 사막을 걷는 것도 이곳에서의 산책만큼 즐거울까. 그곳의 모래는 무슨 색일까. 한없이 펼쳐진 모래 위를 한없이 걷는 건 어떤 기분일까. 사막은 혹시 내가 알고 있는 모습이 아닌 지옥의 다른 얼굴이 아닐까. 무한한 걸음의 반복 속에서 착시에 빠져 방위를 잃고 모래 늪에 빠지듯 멍한 정신으로 실신해버리거나, 귀청을 찢는 고요의 굉음에 미쳐 발작을 일으키거나, 나도 모르게 장애를 가진 영혼을 잉태한 채 바다에 버려지거나, 피난처 없는 대기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맥없이 익사하거나, 거대한 모래폭풍에 휩쓸려 온몸이 산산이 조각난 채 대기의 먼지로 떠돌거나… 설마…. 나는 골목 산책을 마치고 집을 향해 발길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