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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23 . 천국과의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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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차가웠다.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길, 건물, 간판, 가로등, 자동차, 항구 앞에 산처럼 쌓여있는 테트라포드까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거리는 가로등 덕분에 꽤 밝았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떠난 것 같았다. 잘 곳을 찾아야했다. 아직 여자라고 불리기에는 어색한 몸집의 여자아이는 항구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을 선택했다. 문이 열려있는 가장 큰 건물이었다. 바닷바람만 피할 수 있다면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바람으로부터 숨을 수 있도록 최대한 모서리 안쪽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별이 보이지 않는다. 비가 내리지 않는 날에 별을 보지 못하고 잠드는 건 처음이었다. 건물은 차가웠다. 손을 댈 수 있는 모든 면이 차가웠다. 손에 닿는 면이 유일하게 바위뿐이었던 사막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 벽도, 바닥도, 차갑고 매끈했다. 매끈하고 각진 돌의 껍질은 아이에게는 낯선 질감이었다. 사막이 그리웠다. 모래알과 바위. 사막과 사막의 사람들…. 동이 틀 무렵, 건물 안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음식냄새가 풍겨왔다. 아이도 몸을 털고 일어나 사람들의 무리 속에 섞였다. 밤샘 조업을 마친 배들이 돌아와서 잡아온 생선들을 집하장에 부려놓고 있었다. 통조림 공장 직원들은 공장에 가져갈 생선들을 분류해서 박스에 담았고, 박스는 트럭에 실려 공장으로 보내졌다. 사람들은 분주했다. 배의 선장들은 공장에서 쓰지 않는 생선들을 모아서 따로 정리해두었다. 이 생선들은 뱃사람들의 식구와 이웃의 식탁에 오를 것들이었다. 작고 깡마른 사막의 여자아이는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생선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집하장의 한 편에서는 커다란 솥에 스프를 끓이고 있었고, 사람들은 줄을 서서 자기 스프를 받을 차례를 기다렸다. 아이도 줄을 섰다. 생선살과 채소가 가득 들어간 스프였다. 아이의 차례가 되자 아이는 스프 솥 앞쪽에 쌓여있는 빈 그릇 하나를 들고 배식원에게 내밀었다. 배식원은 아이의 얼굴을 오래 쳐다보았다. 배식원은 아이에게 오늘 처음 온 사람이냐고 물었다. 아이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집하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냐고 배식원이 다시 물었다. 아이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배식원은 집하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면 스프를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아이는 오늘부터 집하장에서 일을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배식원은 환영한다고 말하며 아이의 그릇에 두툼한 생선살을 올리고 뜨거운 스프를 부어주었다. 스프는 맛있었다. 생선을 물에 넣어 끓여먹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스프 한 그릇은 아이에게 꽤 많은 양이었다. 이 정도 양이라면 사막에서는 일주일도 먹을 수 있겠구나…. 절반도 못 먹었을 때 이미 배가 불렀으나 아이는 국물 한 스푼 남기지 않고 깨끗이 그릇을 비웠다. 아이는 그날부터 집하장에서 일했다. 생선을 나르는 일은 남자들의 몫이었다. 아이에게는 생선을 구분하는 일이 배당됐다. 생선을 골라내려면 생선의 종류를 우선 알아야 했다. 생선 공부는 의외로 재미있었다. 아이는 생선을 골라낼 때마다 죽은 생선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를 드렸다. 아이의 스프 그릇에는 항상 넉넉한 생선살이 놓였다. 아이에게는 집하장의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숙소가 제공되었다. 일이 끝나면 아이는 숙소에 들어가 함께 일하는 여자들에게서 글자와 글 읽는 법을 배웠다. 쉬는 날을 정할 수 있었으나 쉬지 않고 일했다. 아이는 돈이라는 것을 벌었고, 당연히 어떻게 써야 할지 알지 못했다. 집하장 일을 마치면 도시구경으로 시간을 보냈다. 한 동네에 살면서도 사람들마다 모두 다른 옷을 입는 것과, 다른 집에서 사는 것과, 다른 일을 하며 사는 모습이 신기해보였다. 도시의 하루는 짧았다. 매일 구경해도 이튿날이면 또 새로운 구경거리로 가득했다. 집하장이든 거리에서든 아이와 마주친 사람들마다 아이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 푸른 눈동자. 꾸밈없으나 규칙 없이 헝클어진 머리카락. 깡마른 몸에 까맣게 그을린 피부. 아이는 어느 구석을 봐도 도시사람들과는 달랐다. 아이는 일이 없는 날마다 온종일 도시를 쏘다녔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아이는 집하장 끄트머리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비가 곱게 내렸다. 곱게 내리는 비는 사막의 미소를 닮아있었다. 이렇게 고운 비라면 세상의 어떤 고뇌라도, 어떤 노여움이라도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대기가 식어가고 있었다. 어깨가 쓸쓸했다. 아이는 사막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사막에도 비가 내리고 있다면 사막의 사람들은 구멍바위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비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빗물로 목을 축이고 있을 것이다. 아이는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겨 비가 떨어지는 자리에 섰다. 사막의 비는 위로였지…. 아이는 고개를 들어 빗물이 얼굴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입술을 열고 빗물을 마셨다. 사막의 비와는 다른 맛이다. 무미하다. 무미하지만 조금 더 끈적이는 맛이다. 아이는 자신에게 닿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아이는 사막이 아니라면 사람이 사는 어느 곳에서도 쉽게 이해받기 어려운 존재였다. 아이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신이 그들과 다르다는 것. 때로는 그들의 의아해하는 시선이 자신의 자유를 방해할 때도 있지만, 자신이 그들을 신기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 견디지 못할 만큼은 아니라는 것. 아이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지만 장날이기도 했다. 아이는 장터구경을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우산은 쓰지 않았다. 외투에 달린 모자를 끌어당겨 머리에 덮어썼다. 장터는 조용했다. 구경나온 사람들이 없는 탓에 사람들의 소리보다 빗소리가 더욱 크게 들릴 정도였다. 장사꾼들은 작은 담요로 어깨를 두르고 멍하니 앉아 길바닥에 시선을 멈춘 채 빗방울이 부서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음악에 몰두하고 있는 장사꾼도 있었다. 장터구경이 시들해진 아이는 시내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도시의 서쪽을 구경하기로 했다. 도시의 서쪽에는 높은 건물이 거의 없었고, 대로 뒤편은 대부분 주택가였다. 큰길 쪽 상가 건물의 붉은 벽돌들은 비에 젖어 무거운 빛깔로 가라앉아있었다. 아이는 화장품 가게 쇼윈도에 붙은 커다란 얼굴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얼굴과 닮았다. 검고, 푸르다. 사진 속의 얼굴은 날 때부터 검은 피부를 가진 자의 것이다. 아이는 계속 걸었다. 비에 젖은 외투가 조금씩 무거워졌다. 아이는 이제 방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발걸음은 도시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이라도 치는 듯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사는 동안 천국을 본 일이 있는가. 살아생전에 천국을 본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아이는 살아서 천국을 보았다. 보았다기보다는 우연히 만났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쨌든 그곳은 천국이었다. 아이의 삶에서 이제껏 본 것, 이제껏 본 곳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이는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물었다. 아이는 흥분해있었다.

“이곳에도 이름이 있나요?”

아이가 물었다.

“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대답했다.

“이곳을 부르는 이름이 있나요?”

아이가 다시 물었다.

“이곳은 꽃집이에요.”

그렇다. 그곳은 꽃집이었다.

“이것도 이름이 있나요?”

길고 뾰족한 모양의 흰 꽃이 핀 화분 하나를 가리키며 아이가 물었다.

“그럼요. 모두 이름이 있어요. 화분 아래를 보시면….”

꽃집 점원은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꽃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각자의 이름마저 가지고 있다. 수선화. 노루귀. 제비꽃. 회양목. 측백나무. 히아신스. 미나리아재비. 담쟁이. 마가목. 사프란. 앵초. 미모사. 모과. 자운영. 물망초. 국화. 데이지. 옥잠화. 치자나무. 튤립. 버들. 과꽃. 민들레. 패랭이. 백리향. 장미. 라일락. 나팔꽃. 월계수. 제라늄. 프리지아. 복사꽃. 금잔화. 아네모네. 달맞이꽃…. 꽃잎들은 미세한 몸짓으로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뭇잎들은 빛을 내거나 색이 연해지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꽃집의 모든 생명들이 살아 움직였다. 아이의 눈동자 속에서는 화초의 뿌리를 감싸고 있는 흙마저도 생명이었다. 아이는 비로소 자신의 영혼의 빛깔에 꼭 맞는 천국을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