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25 . 풀, 바람, 행복

**

망각의 강은 두 사막을 가로지르고, 강의 끝은 바다에 닿아있다.


강의 아래로는 모래사막, 강의 위로는 초원의 사막이다. 흔히 사람들은 모래사막과 초원의 사막이 전부가 아니고 두 사막 너머에도 다른 사막이 있다고 믿는다. 초원의 사막 위로는 바다라고 불러도 될 만한 크기의 호수가 있는데, 호수 너머에는 아직 가본 사람이 없다. 초원의 사막은 녹색이다. 일 년 내내 녹색이다. 풀은 10센티미터 이상 자라지 않는다. 새로운 씨를 뿌려도 땅이 반응하지 않으므로 새로운 종자의 경작은 불가능하다. 초원의 사막에는 큰 나무들이 있다. 보통 큰 나무가 아니다. 전설에나 나올 법한 거대한 나무들이다. 나무들은 초원의 사막 사람들에게 지붕과 그늘이 되어준다. 그들은 강의 물고기를 먹고, 강과 호수의 물을 마시고 산다. 초원의 사막 사람들은 몇 종류의 짐승을 키운다. 그들이 키우는 짐승은 말, 소, 양, 염소 등이다. 모든 짐승들을 풀어놓고 기르지만 한 마리도 사람들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사막의 사람들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유목민처럼 산다. 모래가 없는 사막, 물과 고기와 생선을 즐길 수 있는 사막이라니…. 정말 살만한 사막 아닌가. 그들이 유일하게 가질 수 없는 것은 소금뿐이지만 다행히도 소금은 모래사막의 사람들에게서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지상천국. 초원의 사막은 땅 위에 존재하는 둘도 없는 천국이었다. 단지 꽃이 피지 않는 천국. 초원의 사막에는 놀랍게도 꽃이 피지 않았다. 나무도 풀도 꽃을 피우지 않았다. 그들은 늘 녹음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평생 꽃을 보지 못하고 이승을 떠났다. 사막의 북쪽에는 수평선이 보일만큼의 거대한 호수가 있었는데, 이 호수를 호수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소금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록의 사막 사람들은 배를 건조할 수 없었으므로 호수를 건너본 일이 없었다. 당연히 호수 너머의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고, 떠도는 이야기들도 많았다. 누군가는 호수 너머에 절벽이 있고 호수의 물이 폭포가 되어 떨어진다고 했다. 절벽은 오랜 세월 자란 이끼로 무성하게 덮여 있어서 이끼절벽으로 불린다고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절벽이나 이끼를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초록의 사막에는 늘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폭풍우가 부는 날은 일 년에 열흘도 채 되지 않을 만큼 평온한 기후가 이어졌다. 호수는 바다처럼 넓었지만 파도치지 않았다. 초록 사막의 사람들 또한 모래사막의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땅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 역시 그들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주변에 나무가 한 그루도 없는 넓은 초원을 그들은 마당이라고 불렀다. 바람이 소리가 되어 들릴 만큼 불어오는 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마당에 모여 풀 위에 몸을 누이고 바람과 바람에 흔들리는 풀이파리들의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마치 새들의 지저귐이나 작은 시냇물 소리 같았다. 사람들은 눈을 감고 대지 위에 무수히 덮인 이파리들의 잔잔한 떨림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영혼은 소리의 나라로 옮겨갔고, 새들의 노래를 듣고 계곡의 바람에 몸을 적셨다. 그들은 풀 위에 누운 채로 가만히 미소 지었다. 행복. 풀과, 바람은 행복이었다. 초원의 사막은 일 년 내내 봄과 여름의 향기로 충만했다. 아이들의 피부는 희고 광채가 났다. 나무 덕택이었다. 큰 나무의 이파리들은 어른들의 몸통만큼이나 크고 가지마다 촘촘히 붙어있어서 나무 아래에는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햇빛도 들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머니들과 함께 나무 그늘 아래에서 바람을 들으며 하루를 보냈다. 아이들은 바람소리를 사랑했다. 바람의 품 안에서 상상의 이파리를 활짝 펼쳤다. 아이들은 새벽 어스름에 내리는 이슬에 젖어 푸르게 살아나는 초원의 풀을 닮아있었다. 아이들은 호수 너머의 땅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청춘의 시절이 오고 혈관과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후에도 그들은 호수를 건널 수 없었다. 초원의 사막에 사는 청년들은 성인이 되면 모래사막의 여자들과 결혼하여 모래사막의 사람들을 돌보고 책임지는 어른들로 장성하였고, 호수를 건너보겠다는 소원은 어린 시절의 꿈으로 남아 망각의 강 아래로 사라졌다. 초원 사막의 사람들에게 나무를 베는 것은 엄격한 금기였다. 그들은 초원의 나무들을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그들의 조상처럼 여겼다. 그들이 나무를 벨 때는 오직 짐승의 가죽과 고기를 손질할 때 쓰는 목검이 필요할 때뿐이었는데, 그나마 가장 튼튼하게 자란 굵은 가지 하나둘을 꺾어내는 것이 전부였다. 모래사막의 청년이 초원의 사막으로 장가들어 오는 날에는 부족 사람들 모두가 모여 청년으로부터 모래사막의 소식을 듣느라 몇 날 며칠을 마당에서 지내기도 했다. 초원 사막의 새 가족은 짐승을 다루는 법과, 죽이는 법, 손질하는 법과, 목검을 만들고 다루는 법을 배웠다. 모래에 쓸린 자국이 온몸을 덮고 있는 모래사막의 청년들은 마치 사지에서 돌아온 전사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푸른 낙원에 몸과 마음을 적응하는 시기를 거쳐야했다. 그들은 모래사막에 남겨두고 온 부모님과 형제들을 그리워하고 걱정하며 오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내가 된 여자들과 초원의 잔잔한 바람은 모래사막의 전사들을 위로하느라 부족의 일을 놓은 채 그들을 떠나지 않고 온종일 곁을 지키며 그들의 눈물과 함께했다. 여자들은 전사들과 함께 자주 호숫가에 나갔다. 호수 역시 고요와 잠잠함으로 젊은 영혼들을 위로했다. 그들의 영혼은 모래사막을 떠나온 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야만스런 모래폭풍에 시달렸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상처는 아물었고, 모래사막의 전사들은 푸른 사막의 노련한 유목민이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