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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29 . 젖은 거리, 헌책방, 도시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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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는 마치 생선 집하장과 고기잡이배와 통조림공장을 빼면 바쁠 일이 전혀 없다는 듯 한없이 한가롭다. 젖은 벽돌의 붉은색은 태양 아래에서보다 더 붉은 빛으로 선명하다. 사람들의 표정은 젖은 도로의 색과 아주 잘 어울린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도시의 길과 사람들의 얼굴을 보여주며, ‘이것이 이제 네가 살아야 할 세상이다.’라고 얘기해준다면, 아기는 울음을 터뜨리며 어머니의 자궁 속, 따스한 양수 안으로 돌아가려 할 것이다. 세상이 어두운 것은 먹구름 탓이다. 길이 젖은 것은 비가 내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얼굴이 컴컴한 것은, 얼굴 뒤에 내일에 대한 걱정 따위의 까만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겨우 그 때문이다.’라며 아기를 위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잘 다독여서 훗날 이 거리 위를 우산을 쓰고 걸으며 또 하나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훌륭한 어른으로 키워야할 것이다. 나는 모형 장난감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배. 아주 작은 배가 눈에 들어온다. 작지만 정교하다. 배에 있어야 할 모든 것이 새끼손톱만한 크기의 배 안에 모두 담겨있다. 정교함으로 치자면, 아무 일도 아닌 일을 미리 소급하여 면밀히 우려하는 인간의 근심과 꼭 닮아있다. 이 도시의 우산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대부분 검은색이거나 짙은 감색이다. 비가 매일 내리는 곳이니 장례식에 갈 때를 대비해서 일부러 어두운 색의 우산을 사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 도시는 우산조차도 구경거리가 되지 못하고, 지루한 소품 하나를 더하는 의미밖에 지니지 않는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서로를 신경 쓰지 않는다. 볼 게 없는 것이다. 외투만 해도 그렇다. 모두가 마치 같은 옷가게에서 사 입은 듯 비슷한 모양과 비슷한 어두운 색을 띤다. 사람들을 구경하다보면 어쩌면 이 도시는 매일이 장례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조금씩 도시의 변두리에 닿고 있다. 선장이 의도했을지도 모를 곳이 눈에 띄지만 그냥 지나쳐 걷는다. 저곳은 올 때 들러도 된다. 아무리 걸어도 도시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아직까지도 길가에는 상점들이 보이고, 시골농가 풍경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빗줄기가 굵어진 참에 나는 가까운 작은 책방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헌책방인 모양이다. 이 나라에서 출판한 책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언어로 쓰인 헌책들로 가득하다. 나는 비를 핑계 삼아 오래 책을 구경한다. 나이 든 주인은 나에게 잠깐 눈길을 주었다가 이내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묵은 종이 냄새와 약간의 곰팡이 냄새가 난다. 노인의 앞에는 작은 전기난로가 놓여있고, 그 위에는 주전자가 놓여있다. 책방은 그리 춥지 않다. 신간이 꽂힌 책장과 헌책이 꽂혀있는 책장은 좌우로 구분되어있고 책은 잘 정돈되어있다. 각각의 책장은 장르별로 나뉘어져있는데, 나는 헌책 책장의 소설 칸에서 낯익은 책을 발견한다. 노파의 사막 이야기다. 이 책이 소설이었던가? 이것은 수필이거나, 더 세분화하자면 여행기쯤에 있어야 하는 책이 아닐까. 책은 노파가 가진 것보다 한결 깨끗해 보인다. 헌책방에까지 놓여있는 걸 보니 책이 꽤 팔린 모양이다. 책의 표지 다음 장에 ‘누구에게~’라고, 받는 이의 이름과 주는 이의 이름이 쓰여 있다. 주는 이의 이름이 노파의 이름이 아닌 걸로 봐서는 애독자가 친구나 연인에게 선물한 것임에 틀림없다.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노인의 음성이 들린다.


“그 책을 읽어보았소?”

“네. 신화 같은 내용이더군요.”

“글쎄… 사실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오.”

“그렇죠. 바다 속 땅이 솟아올라 육지가 되기도 하니까요.”


노인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 노인은 내게 주전자에서 끓고 있는 차를 한 잔 따라주며 마시기를 권한다. 나는 차를 마시며 조금 더 책을 구경한다. 창밖으로 비가 잦아들고 있다. 나는 노인에게 인사를 한 후 우산을 챙겨들고 책방을 나온다. 오늘은 너무 멀리 나온 것 같다. 나는 더 멀리 걷는다. 도시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건물들의 간격이 조금씩 벌어진다. 이제는 정말 더 이상 구경할 것이 없다. 대로 옆으로 밭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크고 작은 공장들이 보인다. 무슨 공장인지는 알 수 없다. 대로변의 인도가 사라지고, 대로만 남는다. 나는 이제 흙길을 걷는다. 차도 없고, 인적도 없다. 갓길 이곳저곳이 패이고 물이 고여 있다. 부츠가 젖어간다. 이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