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불면인2018. 12. 21. 17:37


꿈 | 광장


시장거리에서 요깃거리를 찾고 있었다.

식당골목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내가 걷고 있는 길목에는 옷가게들만 즐비했다.

그 다음은 과일가게들이었다.

과일가게골목이 끝나는 지점에서 갈림길을 만났다.

왼쪽은 신발가게골목이었고, 오른쪽은 식당골목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골목의 첫 번째 집으로 들어갔다.

나무주걱을 든 노파가 나를 보자마자 대뜸 물었다.

“광장에는 다녀오셨소?”

어리둥절했다.

나는 근처에 광장이 있다는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광장이 있습니까?” 노파에게 물었다.

“저희는 광장에 다녀오신 분들께만 식사를 팔아요.”

노파는 달력을 찢어 그 뒷면에 광장으로 가는 길을 그려주었다.

시장에서 광장으로 가려면 긴 터널 같은 길을 지나야하는데,

그 길은 검은 산의 중앙을 가로질러 나있다고 했다.

시장을 빠져나와 노파가 가르쳐준 대로 4번대로 앞에 서서 남쪽으로 몸을 돌렸다.

검은 산은 작은 산이 아니었다.

노파의 설명을 들을 때는 그저 어두운 빛깔의 산이겠거니 했으나,

실제로 본 검은 산은 말 그대로 검은 산이었다.

입구에 닿는 데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산의 모양은 기묘했다.

검은 산은 폐타이어를 쌓아올려 만든 산이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

산 둘레로는 잔디를 닮은 어린 풀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것 또한 신기했다.

한 겨울에 녹색 풀이라니.

통로를 찾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폭은 3미터 남짓.

길의 좌우로 폐타이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길 위에도 녹색 풀이 자라고 있어서 마치 진녹색의 카펫을 깔아놓은 것 같아 보였다.

길의 초입을 걷는 동안에는 가슴이 미어지게 답답했다.

좌우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검은 색의 향연.

쌓여있는 타이어 사이로 보이는 회색 하늘.

고개를 들어도, 좌우를 살펴도, 갑갑하고 어두운 색 범벅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땅을 보며 걸었다.

그나마 녹색 풀이 마음을 조금 진정시켜주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을 무렵,

나는 잠시 고개를 들었고, 놀라운 풍경을 보았다.

어두운 무채색으로 뒤덮인 검은 숲.

그 숲을 가로지르는 녹색 길.

곧게 뻗은 녹색 검이 검은 장막을 가르고 있었다.


거대한 광장이었다.

지평선이 보일 지경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만 평은 족히 넘을 듯해보였다.

광장에는 눈이 쌓여있었다.

드물게 사람들의 발자국이 보였다.

광장의 동서남북으로는 비잔틴 양식의 거대한 건물들이 들어서있었고,

그것은 거인들의 나라에 만들어진 거대한 무덤, 혹은 묘지를 연상시켰다.

길의 바닥은 붉은 벽돌로 마감되어있었다.

마주보고 있는 두 쌍의 건물들을 잇는 거리에는 눈이 쌓이지 않았다.

건물에서 나오는 하수관을 길 바로 아래에 묻어 광장 중앙에서 만나도록 설계했을 것이다.

만 평짜리 하얀 캔버스 위에 그려진 붉은 십자가.

누구의 작품일까.

광장의 테두리에는 거의 10층 높이에 달하는 거대한 낙엽송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숲속에 십자가를 그린 셈이지만 아쉽게도 녹음을 벗어버린 쓸쓸한 숲이었다.

광장에는 서너 명의 사람들만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십자가의 북쪽 끝에 서서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눈은 눈처럼 희었고, 붉은 바닥은 핏빛처럼 붉었다.

마른 낙엽송 숲을 뚫고 북풍이 몰려왔다.

옷깃을 세워야했다.

몇 안 되는 사람들마저 하나둘 광장을 떠났다.

무거운 구름 너머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바람


바람을 느끼고 싶은 새벽이면 나는 강가에 있는 커다란 고가도로 아래로 간다. 원형에 가까운 공중교차로는 마치 거대한 대관람차가 옆으로 드러누운 채 허공에 떠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손가락과 겨드랑이 사이로 바람이 흐른다. 얼음 알갱이들을 품은 이 바람은 날카롭고, 차고, 따스하다. 바람의 방향을 잘 읽으면 손바닥에 얼음가루를 쥘 수도 있다. 면도날처럼 예리하다. 손에 쥔 순간에는 모래알처럼 단단하다. 그러나 곧 불에 닿은 아기의 손가락처럼 맥없이 녹아내린다. 별 것 아닌 부서진 얼음 덩어리에서 후드득, 생명의 소리가 들린다. 이대로 좋을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흐르는 바람에게 소원을 빈다.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는 물처럼 내가 닿아야 할 그곳으로 나를 데려가주기를. 나도 당신처럼 한때는 앙칼진 빙각이었다고. 저 둥글게 돌아가는 거대한 교차로처럼 한 바퀴를 수십 수백 번 돌고 돌아 다시 지금의 끔찍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더라도 제발 이 순간만큼은 나를 어디론가 좀 데려가주기를.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운 곳이어도 좋으니 이곳이 아닌 낯선 어디론가 나를 좀 데려가 주기를. 제발… 대신 내가 보지 못한 땅, 여생에 밟아보지 못할 땅으로 데려가주기를.

바람이 잠들 때까지 나는 눈을 감고 여행을 한다. 나비도 아니면서 매일 껍질을 벗고, 날개도 없으면서 한없이 멀리 날아간다. 하지만 새벽은 누구에게나 찰나일 뿐이다. 새벽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더욱이, 그것이 아름다운 새벽일수록, 몹시 짧은 찰나. 거대한 도시의 구조물들 사이로는 구름 위의 하늘을 나는 바람보다 더 거센 광풍이 불고, 사나운 바람은 바람을 사랑하는 자를 바람 속에 세워두지 않는다. 바람 속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결국. 나는 바람이 아니고, 바람이 아니므로 어디로도 떠날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이 세상에 바람만큼 가벼워서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날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없다.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불행이라는 건 바람일 수 없음. 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사람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음. 이 가장 큰 불행인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도 나는 여전히 바람 소리를 듣는다. 바람은 먼 곳에서 더 먼 곳으로 숨을 죽이며 날아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오늘 중으로는 나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숲을 만나고, 모래밭을 만나고, 바다를 만나고, 나약한 양철지붕을 만난다. 바람은 더 멀리 날아간다. 이대로라면 몹시 감사하게도, 오늘 중으로는 나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영원히 한쪽으로만은 불어갈 수 없는 운명대로, 바람의 글에는 방향이 없다. 그리고 나에게는 바람의 고독을 해석할 여유가 없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늘 그래왔듯 법 없이, 방향 없이, 그날그날 각자에게 열리는 길을 따라 불어갈 뿐이다. 쪽빛 하늘에 구름이 가늘게 번진다. 마른 살 찢어서 툭툭 뿌리듯 이 길, 저 길로 마구 번져나간다. 그래, 바람은 결코 한 쪽으로만 불지 않는다. 그 길을 일일이 따라가려면 몸도 영혼도 조각조각 찢어 보내야 한다. 구름은 결국 바람이 써내는 글이다. 읽고 싶다. 그러나 읽으려고 해서는 이해할 수 없고, 쫓아가야만 결말을 알 수 있는, 아주 긴 글.

강 바깥쪽 대형마트에서 주워온 커다란 종이박스 다섯 개를 터널처럼 이어 붙였다. 내 몸 하나 들어가기에 딱 좋은 크기에 바람도 막아준다. 강가에 박힌 것 중에서 제일 굵은 교각 옆에 박스를 놓고 몸을 들이민다. 분명 실내에 들어와 있는데 귓전으로 바람이 분다. 문득 이 모든 것이 고마워진다. 종이상자도. 바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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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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