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불면인2018. 12. 23. 09:25


꿈 | 칼집


뱀은 거울을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습이 자신과 같은 종족,

혹은 다른 종족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므로 당연히

같은 종족, 혹은 다른 종족의 시선을 괘념치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특히 여자는 뱀과 다르다.


여자는 자신의 몸이 원래 그렇다고 했다.

말쑥하게 치장한 여자다.

여자가 이야기한 원래 그렇다는 것은 날 때부터 그렇다는 의미다.

그녀를 처음 안은 간호사와 그녀의 어머니는 둘 다,

이 아이가 산 생명이 맞나?

이런 상태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오래 살았고,

꽤 오래 살아남아서 뼈가 굳고,

살이 찌고,

어른이 되고,

취직도 했다.

그녀를 만난 건 친구들과의 정기 모임에서였다.

친구 하나가 말했다.

“신기한 사람이 하나 올 거야. 외모에 너무 놀라지 말고, 신경 쓰는 척도 하지 말고.”

하지만 나는 외모에 우선 놀랐다.

여자였고,

미모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미모라기보다는 미소가 밝은 사람이었다.

옷차림새도 전형적인 틀의 야무진 직장여성의 것이었다.

깔끔한 흰색 블라우스.

무릎 아래 10센티에 딱 걸리는 타이트한 정장 치마.

종아리의 선이 고왔다.

하지만 종아리부터가 문제였다.

사람의 눈이 가진 문제는 눈에 보이는 것을 스스로 가릴 수 있는 능력의 부재.

즉, 선별해가며 볼 수 없다는 데 있다.

예고 없이 보았다면 신음을 뱉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몸이 아니다.

그녀의 미소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혹독한 몸이다.

내 시선을 방해라도 하려는 듯 분주하게 식사가 차려진다.

메뉴는 소갈비다.

두툼한 갈빗살에 보기 좋게 칼집이 들어가 있고,

칼집 사이사이로 양념이 고루 배어있다.

일행은 찬과 갈비를 보며 행복해한다.

허옇게 잘 익은 숯불이 들어오고,

숯불 위에 석쇠가 오르고,

고기가 구워진다.

숯에 익어가는 소고기 냄새가

‘이 정도면 나도 음식 중의 예술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숯도 고기도 예술인 것은 맞는데,

나는 자꾸 욕지기가 난다.

그러나 초면의 손님 앞에서 속을 게워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억지로 신물을 삼키며 버틴다.

고기가 얼추 익었을 무렵,

젓가락들이 곡예라도 하듯 불판 위를 날아다닌다.

먹어야 산다.

먹어야 사는데,

기왕이면 맛있는 걸 먹으면 더욱 좋고,

맛있는 것 중에서는 고기를 빼놓을 수가 없고,

지금 바로 눈앞에 맛있는 고기 중에서도 꽤 맛있는 고기가 석쇠 가득 펼쳐져 있는데,

나는 그녀의 종아리와 허벅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종아리는 가늘고 허벅지는 말처럼 두껍다.

예쁜 다리다.

아주 예쁜 다리다.

속에서는 자꾸 신물이 넘어오고 욕지기가 난다.

속이 울컥하여 젓가락을 들고 고기를 집을 수가 없다.

친구가 내게 눈치를 준다.

내가 뭘 보고 있는지 녀석은 알고 있다.

왜 내가 고기를 못 집어 먹는지도 알고 있다.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조용히 식사를 한다.

가볍지만 천하지 않은 미소다.

고기도 가끔 집어 먹는다.

근황을 이야기하는 음성이 차분하다.

가만히 살펴보니 손가락이 길다.

손톱도 길다.

고기보다는 채소에 젓가락이 더 자주 간다.

좋은 숯과 싱싱한 소갈비와 고기가 익어가며 내뿜는 연기가,

곧 고기 먹을 입들의 눈을 즐겁게 하듯,

그녀의 젓가락질도 내 눈을 즐겁게 한다.

이런 여자와의 식사라면 하루 종일 밥상 앞에만 앉아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그녀의 미소를 보며 잠시 그녀의 난도질 된 살 생각을 잊는다.

나도 고기 몇 점을 집어 먹는다.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이 더 반길 만한 맛이다.

고소하다.

담백하다.

나는 몇 번 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가벼운 식사를 이어가다가,

내 눈동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눈치 챈 듯 애써 밝은 표정으로 운을 띄운다.

치마 위에 덮고 있던 커다란 손수건을 집어 올려,

모서리를 맞잡고 팽팽하게 당겨 편 후 다시 칼집 난 허벅지를 가린다.


“사막을 걸어요.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는 거예요.

소나기처럼 들이 붓는 비가 아니라 봄비처럼 촉촉이 내리는 비요.

머리카락도 젖고,

옷도 젖고,

몸도 젖어가죠.

그런데 비를 피할 곳이 없잖아요.

피할 곳이 없으니 비를 맞고 있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옷을 입고 있어도 입고 있는 것 같지 않고,

발가벗고 있어도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인 거예요.

제가 바로 그런 경우예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여자는 무겁게 말문을 열고 가볍게 미소를 짓는다.

이슬에 젖은 소국처럼 소박하고 고운 미소다.

여자의 눈동자가 무심하게 상 위를 훑고 지나간다.

상 위는 가득 차 있고 여자의 눈동자는 잠시 텅 비어버린다.


“처음에는…

처음에는 외롭고 힘들었어요.

사람들은 저를 아예 보려고 들지도 않았거든요.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전이되니까요.

막상 고통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저뿐인데 말이에요.

가슴이 많이 아팠고,

많이 외로웠어요.

이렇게 목숨을 부지해나가는 일이 옳은 건가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해법을 알아요.

뭔가 잘 모르겠다 싶을 때는,

무조건 더 가봐야 해요.

막다른 길이 나오더라도 말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막다른 길에서 고통도 외로움도 잊을 수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편안해요.”

그녀가 말했다.

과연 편안할까?

그게 제대로 된 해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더 이상 괴롭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그녀의 인생에서 얻을 수 있었던 마지막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하체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날것으로 보여주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칼로 난도질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몸이,

날 때부터 그랬다고 했다.



꿈속의 그녀는 현재의 내 고통을 과장하거나, 고통의 선명함을 맛보여주기 위해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살이 갈라지는 깊이는 다르더라도 살이 베이는 고통은 닮았으니까. 욕구나 고통의 속살에는 평화가 앉을 자리가 없고, 폭력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소원만이 가득할 뿐이다. 비폭력을 향한 희망은 몸 안에서부터 깨어지고, 살가죽이 찢어짐으로서 피날레를 장식한다. 병마는 결코 그 안에 선을 위한 방을 내주지 않는다. 병마는 조건 없이 주어지는 고통이자 파괴다. 서슬 퍼렇게 날 선 아가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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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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