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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묵상

한 페이지 독서 -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https://youtu.be/lYilJMjv0gk

에밀 시오랑은 루마니아를 고향으로 태어나 스물세 살부터 프랑스에서 살며 프랑스어로 글을 쓴 수필가이자 철학자입니다.
세상은 그를 허무주의자로 불렀고, 작가 자신은 자신을 회의주의자로 불렀습니다만, 그가 가진 시선이 회색에 가깝다는 것은 작가의 숙명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스스로 자신을 ‘절대적인 낙오자’라고 불렀을 만큼 그의 삶은 가난했고, 글은 잘 팔리지 않았고,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했던 나라인 프랑스에서조차 그는 끝까지 스스로 고독하고자 했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삶을 비극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 삶을 고통으로 해석하는 눈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에밀 시오랑의 눈을 잠시 빌어야 할 겁니다. 그의 삶 전체가 녹아있는 그 자신의 어두운 시선은 늘 인간 삶의 그늘진 면을 향해 있었고, 그곳에서는 다름 아닌 바로 그 자신이 주인공이었습니다.

작가는 ‘더 이상 살 수 없음’이라는 글에서 ‘삶이란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화덕에서 타고 있는 불꽃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아마도 우리의 인생이 언제 터져서 재가루가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하지만 그의 아포리즘이 문득문득 시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그는 ‘절대 서정’이라는 글에서 어떻게 철학자가 시인으로 변해갈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혼란의 극치! 더 이상 무엇을 분별할 능력도 없고 밝혀낼 능력도 없으며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느낌이 철학자를 시인으로 만든다. (중략) 철학자가 시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극적이다. 추상적 질문과 형상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꼭대기에서 추락하여, 영혼의 부분들이 서로 얽혀 혼돈스럽고 기이한 체계를 이루게 되는 의미의 혼란 속으로 침몰한다. (중략) 여기에서 철학적 체계, 명확한 체계는 배제된다. 형상의 세계에서 시작했던 많은 정신들은 이제 혼란에 도달하고 만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시적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는 철학을 할 수 없게 된다.’

이 대목은 자신이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허무주의자이자 동시에 시인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처럼 들립니다.

그는 폐허의 철학자로 불릴 만큼 폐허 그 자체인 자신의 삶과 감정의 곳곳을 마치 넝마주이처럼 세세히 훑고 다녔지만 그의 글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왜 저토록 뜨겁게 허무와 폐허를 뒤지며 살았을까... 허무에 대한 저 뜨거운 에너지는 대체 무엇을 달구기 위해 저렇게 펄펄 끓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하지만 정작 작가 자신이 서있는 곳은 허무와 폐허의 땅인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마음을 이끄는 공간에 대한 고백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멀리 있는 것들, 내가 세상에 투사하는 거대한 빈 공간에 이끌린다. 텅 빈 느낌이 마치 가벼워 만질 수 없는 유체처럼 사지와 기관들을 통해 점점 올라온다. 무한대까지 계속 확장되는 빈 공간 속에서 나는 왜인지 모르지만 일찍이 인간 영혼에 깃들었던 것 가운데 가장 모순된 신비감을 느낀다. 행복하면서 동시에 불행하다. 흥분해 있으면서 동시에 침체되어 있고, 지극히 모순된 조화 한가운데서 절망과 쾌락에 휩싸여 있다. 너무도 유쾌하고 너무도 슬퍼서, 내 눈물에는 천국과 지옥의 잔영이 동시에 있다.’

작가가 서있는 곳은 두 가지 극단의 상태와 감정이 공존하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결국 그곳에 선 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둘 중 그 어느 쪽도 아닌 허무뿐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작가는 ‘내가 보았던 모든 것을 내 안에 품고 산다는 것이 가능한가?’ 라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또 스스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인간에게는 모두 같은 단점이 있다. 살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중략) 더 이상 아무것도 기다릴 것이 없는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는 사는 것을 배운다.’

말년의 에밀 시오랑은 문단으로부터 니체를 뛰어넘는 아포리즘의 제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지만 그가 숨을 거둔 파리의 단칸 아파트는 제왕의 궁궐이라기보다는 일생의 가난이 그에게 준 소박한 영감의 산실처럼 보입니다. 꼭 가난 때문이 아니더라도,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데는 큰 집이 필요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무의미’라는 글 속에 있는 짧은 대목으로 이 책의 소개를 마칠까 합니다.

‘삶에 대한 깊은 염증, 같은 희극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의식이 시간성을 발견하게 한다. (중략) 우리는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시간과 홀로 마주서 있는 또 다른 나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을 내맡긴 밤은 행위나 사물로 장식하지 않은 벌거벗은 시간이다. (중략) 관조의 정적 속에서 우주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끈질기고 비참한 음향이 울려 퍼진다. 존재와 시간을 분리해보았던 사람만이 그 비극을 경험한다. 존재를 피해 도망치다가 시간에 짓눌리는 것이다. 그는 시간이 전진하고 있음을, 죽음이 전진하고 있음을 느낀다.’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김정숙 옮김. 챕터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