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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묵상

한 페이지 독서 - 안토니오 갈라, 사랑의 수첩

https://youtu.be/wcZl-lzuh34

스페인의 작가, 안토니오 갈라가 쓴 이 ‘사랑의 수첩’은 평생에 걸쳐 사랑을 주제로 글을 써온 작가의 사랑에 관한 사유의 정수를 모아서 엮은 책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은 인간과 인간이 나눌 수 있는 모든 관계 속에서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말 그대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모든 인간과 모든 관계에 대한 사랑을 총망라한 개념의 사랑을 담은 책이고, 당연히 시작부터 끝까지 오직 사랑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이 책은 인간이 인간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모든 담론과 잠언을 담은 책이 될 것 같은데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재미있는 소설을 읽듯 처음부터 끝까지 한 달음에 읽기에는 조금 버거운 책입니다. 하지만 사랑을 대변하는 주제어로 구성된 각 장마다 짧은 시구들이 들어있고, 이 시구들이 이 책을 읽는 고통을 줄여주는 작은 창문의 역할을 해줍니다. ‘추억’이라는 장의 한 시구를 읽어보겠습니다.

바다가 우리에게 깊이 스며든다면
그건 우리가 바다이기 때문이다.
처음인 듯 마지막인 듯
우리는 어리둥절하다.
마치 유일한 경험인 것처럼......
어떤 추억들은
물의 앨범에 들어 있다.

우리는 이 책의 굽이굽이마다 옹달샘처럼 숨어있는 이런 시구들을 통해 다행히도 마른 목을 축인 채로 다음 산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연구하는 여러 분야의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우리 인간의 행복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에서 발현되고, 정신적 행복의 뿌리가 되는 것은 바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결국, 사실 인간뿐만 아니라 감정을 지닌 모든 동물은 사회적인 동물이지요. 세상의 모든 돈과 명품과 자동차와 배와 집을 가지고 지구에 혼자 남은 어떤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모든 걸 소유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사람. 그것은 마치 우주 속의 공허나 우주 한가운데의 고독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로 다가옵니다. 혼자라는 사실이 말이지요.

인간의 관계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모든 관계 속에서 행복의 정점을 찍는 감정이 바로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친구, 부모와 자녀, 형제, 애인, 부부... 이 관계들 사이의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여백이 미움이나 증오나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채워져 있을 때 우리는 그 어떤 물건을 소유했을 때보다도 더 진한, 혹은 완벽한 만족을 느끼는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사랑은 우리에게 완벽한 행복을 선물하기도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의 개념을 오해했을 땐 정반대로 지옥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빠졌을 때 흔히, ‘나는 그 사람을 만나려고 태어났다.’라거나 저 사람은 ‘나를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여과 없이, 증명의 절차도 없이 잘 해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랑이 조금 더 운명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래도 조금 더 필연적으로 느껴지고, 조금 더 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하지만 안토니오 갈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한 사람을 위해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작가는 영원한 사랑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칫솔보다도 오래 가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작가는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것만을 믿으려고 하는 인간의 정신적 오류’에 쐐기를 박습니다.

‘고독한 사람들’이라는 장의 서두에 나오는 시구를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가슴에서 저 가슴이 아니라
이 삶에서 저 삶으로
걸어간다.
닫힌 고독의 방에서
즐거운 축제에서
그 전야에 이르기까지
활기찬 일정과는 정반대 길로
밖에서 안으로
우리 불행한 고독을 향해
동행한다.‘

작가가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는, 충만한 행복이거나 완성된 사랑이 아니라 ‘각자의 고독을 향해 걷는 길에 동행자가 되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안토니오 갈라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영원하지도 않고, 우리의 영혼을 충만하게 할 수도 없고, 심지어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의 색에 더 가깝다는 걸 말이지요.
또 작가는 자신이 깨달은 인간적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모든 사랑은 시간에 의해 소멸된다.
자기애만이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은 두 가지 법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타인들을 사랑하는 법과
타인들이 우리를 사랑하도록 강요하지 않는 법.‘

이 대목은 우리는 타인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들이 나를 사랑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사랑의 법칙을 가르쳐줍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법칙에 쉽게 만족할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안토니오 갈라가 인간이 흔히 그리는 사랑이라는 그림의 제목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쓴 한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나머지 모든 것을 배제한 채,
한 오라기의 실처럼 걸려 있는 사람들의 그 친밀한 느낌.
상대방의 거울에서 서로를 찾는 이기심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의 그 친밀한 느낌.
초보자들의 사랑.
우리를 ‘너’와 ‘나’로 작게 축소하는 사랑.
사랑이라는 거대한 공간이 쿠션 두 개와 커피 두 잔이 겨우 들어가는
공간으로 줄어들었다고 믿는 사랑 말이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탐욕이다.‘

‘사랑의 수첩’이라는 책의 제목처럼, 작가는 사랑에 대한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자신의 수첩과 노트에 글을 적었고,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엮었습니다. 한 달음에 읽기보다는 아끼는 과자를 꺼내먹듯 조금씩 나누어 읽기에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숨에 읽으면 더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되는 글도 있는 법이니까요.

제가 ‘사랑’이라는 낱말을 떠올렸을 때, 무언가가 제 심장을 파고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글을 읽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내가 사람들의 언어들과 천사들의 언어들로 말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징과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이해하며
또 모든 믿음이 있어 산을 옮길 수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모든 재산을 바쳐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동하지 아니하며
자기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법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되
예언은 있다 해도 없어질 것이요,
타 언어들이 있다 해도 그칠 것이며
지식도 사라지리라.
(중략)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깨달으며
아이처럼 생각하였으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중략)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신약성경 . 고린도전서 13장]


안토니오 갈라. ‘사랑의 수첩’. 유혜경 옮김. 도서출판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