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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54 . 사막의 언어로 빚어진 영혼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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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하늘을 노래하는 자’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는 날 때부터 혼자였다.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를 대지라 여겼다. 아무도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으므로 땅을 그의 아버지라 여기는 것이 이상하게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세상의 빛을 본 순간에 눈을 감았다. 그는 스스로 움직이는 부족이자 족장이었으며 모든 사막 부족의 가장 큰 지도자였고, 각 사막 사이의 메신저이기도 했다. 사막을 떠도는 것은 그의 탄생 이전에 이미 그의 어머니의 일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어느 사막에도 정착하지 않고 모든 사막 위를 방랑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세월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이미 떠도는 자였다. 그는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노래만큼이나 길을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자궁 안에서, 즉 그의 어머니에게서 노래를 배웠지만 그의 노래와 어머니의 노래는 많이 달랐다.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의 노래만큼이나 그의 노래를 사랑했다. 사막과 사막에서 사막으로 이어진 사막의 땅덩어리를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종단하고 횡단하는 일은 그 어떤 고통스런 사막의 삶보다도 고단한 것이었다. 모래바람에 쓸린 피부 위에는 거친 조개껍질처럼 단단하게 굳은살이 박였고, 맨몸을 드러낸 그의 모습은 불규칙한 크기의 비늘을 덮어쓴 인어를 연상시켰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마른 비늘 아래로는 붉은 피가 만 갈래로 갈라져 강줄기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의 머리칼은 늙은 사자의 갈기처럼 헝클어지고 거칠었지만 가루가 되어 날리는 모래먼지 속에서 염색과 퇴색을 거듭하다가 끝내 은색으로 빛나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그를 ‘은빛사자’라 부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그를 누가 길렀는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사막의 어느 부족도 그를 돌보거나 키운 적이 없었음에도 그는 홀연히 사막에 나타났고, 두 발로 먼 길을 걸을 수 있을 무렵부터 사막을 건너다녔다. 그에게는 비밀이 없었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기에 굳이 이야기해야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날 때부터 벙어리였다. 그는 항상 침묵을 지켰고, 오직 그림으로만 말했다. 그가 소리를 낼 때는 유일하게 노래를 부를 때뿐이었는데 그는 주로 탄생과 죽음 앞에서 노래했다. 그의 여정은 결국 탄생과 죽음을 만나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노래 속에서 많은 메시지를 들었다. 탄생 앞에서는 아기의 미래를 노래했고, 죽음 앞에서는 망자의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의 노래에는 가사가 없었다. 그의 소리는 일렁이는 물결이나 회오리치는 바람을 닮아있었다. 명확한 언어로 표현되는 소리는 단 한 구절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노래에서 사막의 언어로 빚어진 영혼의 소리를 들었다. 그의 노래는 하늘로부터 시작되어 구름으로 덩어리진 후 바람과 비로 변했다가 땅과 호수를 거쳐 다시 하늘로 솟아오른 다음 잦아드는 미풍의 여린 소리로 끝났다. 그의 삶의 시작이 어미의 죽음과 닿아있는 것은 묘한 아이러니였다. 어쩌면 그가 여생을 떠돌며 산 자와 죽은 자를 만나고 그들을 위해 노래하는 것은 그의 운명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막에 단 한 번도 위로가 필요하지 않았던 시절은 없었다. 새 생명은 그 생명을 낳은 어미에게 사막의 고통을 겪고 살아남아야 할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게 했고, 노인의 죽음은 그의 부재로 말미암아 슬픔과 무지에 빠질 수도 있는 남은 자들에 대한 애절한 염려가 되었다. 은빛사자의 노래는 마치 시냇물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따라 흘렀다. 그의 소리는 영혼의 갈증을 달래주고, 마음의 가뭄을 적셔주는 단비였다.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들으며 마음의 위로를 얻었다. 그의 기억의 바닥 깊은 곳에 담긴 작은 토막 중에 물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누가 어린 그를 물 위에 올려놓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이는 바구니를 타고 온종일 물 위에 떠서 물과 하늘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물을 보며 받은 첫인상은 ‘크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눈에 들어온 물은 너무 커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물을 보면서 물을 배우고, 바람을 배우고, 비를 배웠다. 아이의 눈에 비친 물은 흐르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가만히 머물러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항해는 느리고 길었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실제로 그를 물 위에 올려놓았던 자가 나타나 그 때의 너는 하루에 고작 10분밖에 물 위에 떠있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는 그건 내게 일 년만큼이나 긴 시간이었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물을 배우는 일에는 정해진 조건이 존재하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아이의 항해는 계속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아이는 바구니 안에 앉아 물을 맛보고 비를 맛보고 바람을 맛보았다. 세 가지 모두 맛을 가지지 않았다고 느껴질 만큼 옅고 미미한 맛이었다. 바람을 맛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아무리 오래 입을 벌리고 있어도 맛을 느끼기 힘들었고 힘차게 불어오다가도 갑자기 가라앉아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바람은 불어오다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바람이 다시 불어오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아이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소리라기보다는 진동에 가까웠다. 아이는 숨 쉬고 있었고 울림은 계속되었다. 고요하던 자신의 세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는 진동의 뿌리를 찾아 귀를 기울였다. 오래지 않아 아이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소리는 자신의 가슴과 목에서 울리고 있었다. 아이는 노래하고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무의식에 잠긴 채 길고 높은 고음의 소리를 뽑아내고 있었다. 아이의 소리는 새의 비행처럼 매끄럽게 음의 고저를 자유로이 날았다. 아이의 소리가 물이라면, 그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기도 했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흘러 올라가기도 했다. 노래가 시작된 이후로 아이는 잠과 무관한 인간이 되었다. 아이의 밤은 검지 않았고, 아이의 낮은 붉지 않았다. 마침내 아이의 삶은 색을 잃고 ‘음[音]’으로만 존재했다. 아이의 소리는 물과 바람을 오가며 익어갔다. 아이는 소리로 바람을 타는 법을 익혔다. 바람 위에 올라앉아 바람을 따라 흐르거나 바람에 역행하며 바람 속을 뚫고 날기도 했다. 소리와 함께 아이도 성장해갔다. 그의 소리는 태반에서 해방된 아기처럼 자유로이 세상을 유랑했다. 자연은 소리의 유일한 관객이었다. 소리가 시작되고 진동이 대기 안에 자리 잡으면 자연은 곧 그 길고 가느다란 울림에 촉각을 기울였다. 하늘과 바람과 대지… 그 모든 자연 속의 구성원들은 숨을 죽이고 대기의 떨림에 집중했다. 온 자연이 그의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고 다시 잠들었다. 달과 태양이 번갈아가며 그의 청중이 되어주었다. 달은 밤마다 그의 소리를 타고 대기 위를 미끄러지며 뛰어놀았다. 만약 그가 숲의 사람이었다면 나무들도 그의 소리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노래가 늘 흥겹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 자신도 모르는 내면의 슬픔이 잠에서 깨어나 마음속의 방을 거닐기 시작하면 그의 울림은 바닥없는 애곡의 심연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슬픔이 허공을 흔들면 하늘에는 구름이 모여들었다. 켜켜이 쌓인 구름은 한참동안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결국 눈물로 덩어리져 떨어졌다. 그의 애조가 극에 달하고 그의 눈물이 얼굴을 덮고 몸을 적시기 시작하면 빗방울조차 느리게 떨어지며 그의 슬픔을 한 자락이라도 더 들으려 애썼고, 그의 슬픔에 감금당한 하늘은 결국 천둥을 울리고 대지 위에 번개를 내리꽂으며 거센 비로 슬픔을 토해냈다. 그에게 주어진 인생의 절반은 소리였다. 아니, 그의 거죽은 사람이었지만 알맹이는 소리였다. 그는 소리로 세상을 배웠고, 소리로 세상을 탐험했다. 그는 가끔 자신이 누구일까 궁금해 했다. 눈에 그려지는 장면 그대로, 어미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의 자궁에서 모래의 대지 위로 던져진 말 못하는 작은 인간. 누구보다도 느리게 세상을 배운 아이. 하루가 영원인 듯 느리게, 느리게… 모든 것을 기다림을 통해 만나고 배워온 사막의 어린 생명. 그에게 하루는 느리게 다가왔고, 느리게 흘렀고, 느리게 멀어져갔다. 사막은 그의 정원이자, 집이자, 명상을 위한 골방이었으며, 세상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사막은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이성에 대한 사랑만큼은 예외였다. 사막의 많은 여자들이 그의 소리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떠돌아다녀도 그의 반쪽이 되고자 하는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막에서의 삶은 고단하고 험했으나 여전히 방랑보다는 정착이 앞선 가치였다. 그의 여정은 고독했다. 그는 생명이 태동할 때부터 인간에게 빛이 비추지 않음을 알았다. 인간의 시작은 어미의 태 속, 즉 어둠으로부터 말미암고, 그러므로 삶에는 시작부터 빛이 없으며, 빛은 곧 희망이므로 당연히 삶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과, 그런 앎 속에서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의 삶이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어떤 끔찍한 모양의 절망도 그에게는 끌어안아야할 삶의 조건이자 영혼의 일부였다. 그는 외로움에 잠겨 생명을 위협할 만큼 무거운 호흡곤란을 느낄 때마다 자아가 갈라져 흩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는 부서지는 자신을 소리로 다시 긁어모았다. 부서지고 모으기를 한없이 반복했다. 그의 고독은 분열이 아니라 고독의 개체들이 모이고 모여 밀도 높은 완벽한 혼자가 되는 과정이었다. 그는 완벽한 하나의 고독이 되었고, 그것이 ‘떠도는 자’의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