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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64 . 황금빛 모래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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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바다가 오래 이어졌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우리의 귀에 들리는 소리가 오직 정적뿐이었으므로 그 소리밖에는 들을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시간은 정적의 수면 아래에서 더욱 느리고 고요히 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요만큼이나 깊은 먹구름이 몰려왔다. 검은 우주가 품은 암흑의 대기가 모두 이 바다 위로 모여든 것 같았다. 하늘 전체를 덮은 거대한 먹구름이었다. 구름 아래에서는 밤과 낮을 구분할 수 없었다. 구름과 함께 비가 멈췄다. 비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거대하고 고요한 먹구름은 태고의 대기를 떠올리게 했다. 본 적은 없으나 느낄 수 있는 것. 우리의 피와 유전자에 새겨진 태초의 기억…. 잔주름처럼 잘게 부딪치던 파도가 그 폭을 넓히면서 커다란 담요로, 담요에서 작은 평야로, 작은 평야에서 큰 평야로, 큰 평야에서 드넓은 대지로 너비를 넓혀갔다. 넓어진 파도의 표면은 믿기 힘들 만큼 매끈했다. 마치 도시 크기만 한 검은 유리를 바다 위에 깔아놓은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일순간, 세상의 흐름이 멈췄다. 움직이던 모든 것, 움직여야 할 모든 것이 정지했다. 암흑의 먹구름 아래, 한 장 유리 같은 바다 위에, 검은빛의 배 한 척이 미동 없이 떠있을 뿐이었다. 바람도 사라졌다. 불현듯 선장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바다에 폭풍우가 일면 사막에는 비가 내린다.

모래사막에는 오늘, 비가 내린다.






검은 유리가 흔들렸다. 먹구름이 낮아졌다. 비가 시작되었다. 어디까지가 구름이고, 어디부터가 비인지 경계를 그을 수 없었다. 유리 같던 파도가 산산이 깨지며 출렁이기 시작했다. 파도는 높고 가팔랐다. 한 겹, 한 겹의 파도가 낱낱의 절벽으로 변해 수면 위로 치솟아 올랐다. 새하얀 물거품이 끓어오르는 파도의 정점은 만년설로 뒤덮인 거대한 산맥 같아보였다. 파도를 탄 배가 만년설의 정상에 올랐을 때, 나는 신기루처럼 자욱한 해수의 포말 사이로 모래해변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모래해변의 너머에는 모래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그곳은 온통 모래뿐이었다. 모래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배의 밑바닥에서는 회오리치는 무덤처럼 바다가 열리고 있었다. 세상의 어떤 암흑도 이 바다보다 검을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검은 벽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시야를 분간할 수 없는 폭풍우 속에서도 그것만큼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거대한 검은 벽…. 그것은 멀어지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검은 벽은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은 채 우리 앞에 우뚝 서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것은 무너질 벽이 아니었다. 뛰어넘거나 부딪쳐 뚫을 수 있는 벽이 아니었다. 바다는 수면 위의 모든 생명을 삼킬 준비를 완벽하게 마친 채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폭풍우는 태초의 혼돈을 닮아있었다. 혼돈의 축제가 피날레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제 우리 차례였다. 준비된 무덤 속으로 몸을 던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선장은 담배를 꺼내 물고, 손바닥으로 라이터를 감아쥔 후, 아기를 껴안듯 조심스럽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의 마른 볼 위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선장은 느린 호흡으로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들인 후, 키를 잡고 있던 손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곳에는 황량한 모래사막이 무한히 펼쳐져있었다. 모래알의 개수를 세는 일만으로도 영겁의 세월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광막한 모래의 대지. 가슴 속의 공허함을 한 번 더 거칠게 뚫고 지나가는 거대하고 메마른 폐허. 지평선 위로는 황금빛 모래언덕이 파도처럼 일렁거렸고, 등 뒤에서는 성난 바다의 혓바닥이 지치지 않고 모래알을 부수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바다의 끝을 더듬는 내 눈동자 속에서 하늘과 구름과 비와 바다가 같은 색, 같은 어둠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