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불면인2018. 12. 26. 02:48



방문객


잠결에 인기척을 느꼈다. 발자국소리도 들은 것 같다. 비몽사몽간에 억지로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본다. 아무도 없다. 몸이 약해진 탓일까. 운동장에는 흰 눈이 양털처럼 수북이 깔려있다. 지난밤에 너무 멀리 다녀온 탓인지 온 다리가 쑤신다. 속이 쓰리다. 마지막으로 끼니를 때운 게 언제였지? 어제? 아니다. 그제? 아니다. 그끄제? 글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며칠 전 골목에서 주워온 묵은 빵을 잘게 부숴서 현관 입구에 뿌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둘기들이 모여든다. 가끔 까치 떼가 놀러올 때도 있다. 잠시 새들의 날갯짓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어떤 소리는, 특히 생명이 자신의 몸을 움직여 내는 소리는 듣는 이에게 안정을 주고,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소리가 곧 생명과 삶의 증거인 셈이다. 작은 빵 한 덩이를 가슴에 품는다. 그리고 소리 내어 책을 읽는다. 오늘 읽는 책은 평론에 가까운 글이다. 제목만 들어도 알만한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다. 제작 배경이나 감독에 관한 이야기. 가끔은 감독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감독이 이러저러한 환경적, 심리적 배경으로 이러저러한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는 번외판스러운 내용이다. 주인공들에 대한 이야기도 물론 빠지지 않는다. 소리 내어 읽기에는 내용이 조금 가볍다. 나는 읽기를 멈춘다. 그리고 빵이 데워지기를 기다린다. 연해지기를 기다린다.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리고 나면 현관 앞에 뿌려둔 빵조각들은 곧 마법처럼 사라진다. 태양이 대지 위에 쌓인 눈을 비추고, 눈이 빛을 반사한다. 하늘을 봐도 눈이 부시고, 땅을 봐도 눈이 부시다. 진정 눈부신 아침이다. 뱃속이 계속 그르렁거린다. 창자가 접혔다가 꼬이고, 꼬였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한다. 운동장에는 하늘이 선물한 넓고 흰 양탄자가 보기 좋게 깔려있다. 오늘도 학교를 찾는 손님은 없을 듯하다. 백색 양탄자는 눈이 녹을 때까지 아무도 밟지 않은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하얀 순수를 그대로 품은 채 잠든 듯 누워 있다가 때가 되면 녹아내릴 것이다. 식사를 마친 비둘기들이 양탄자 위를 뛰어다니며 술래잡기 놀이를 한다. 녀석들은 강아지마냥 신이 나서 이리저리 푸드덕거리며 깡총깡총 눈 위를 뛰어다닌다. 의미는 없지만 재미는 있는 짓. 길의 삶을 살면서 저런 놀이를 구경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무의미한 놀이의 가치를 깨달았다고나 할까. 비둘기들의 놀이는 한동안 계속된다. 까치들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운동장 둘레에서 자라는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에는 많은 까치 가족들이 입주해있다. 까치들은 아침식사를 했을까. 나는 오늘 오랜만에 강 구경을 가보려고 한다. 하지만 계획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 다가올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나는 이제 먹을 수 있을 만큼 녹은 빵으로 아침식사를 시작한다. 녹기는 했지만 잘 씹히지 않는다. 물통의 뚜껑을 연다. 물맛이 이상하다. 새 물을 받아와야 할 것 같다. 나는 빵을 도로 품안에 집어넣고 현관을 나선다. 버스의 코너를 도는 순간 나는 잠시 얼어붙는다. 발자국이다. 사람의 발자국이다. 다른 버스를 들른 흔적은 없고, 오직 내가 사는 버스 주위에만 흔적이 남아있다. 발자국은 승객이 타고 내리는 앞문 쪽으로 이어진다. 내가 잠든 동안에 다녀갔을 것이다. 누굴까. 버스의 주인인가? 학교 선생님일까? 왜 나를 깨우지 않았을까? 왜 내쫓지 않았을까? 나는 물 긷기를 포기하고 버스 안으로 돌아간다. 심장이 거칠게 뛴다. 누군가 나의 존재를 알고 있다. 어쩌면 머지않아 버스를 떠나야할지도 모른다. 버스를 떠나야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 집인 듯 살았지만 어차피 내 집은 아니었다. 이별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면, 이별해야 한다. 이별에는 이유가 있고, 상황이 있고,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 있다. 세상의 모든 이별은, 그래서 슬프다. 나는 외출도 독서도 그만두고 종일 창밖 풍경을 감상하기로 마음먹는다. 떠나고 나면, 돌아오기 힘들 것이다….




꿈 | 노인들


집에는 많은 사람이 산다.

모두 낯이 익고, 모두 내가 아는 사람들이다.

모두 착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모두 약한 사람들이다.

이곳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모두 노인들이다.

나는 종일 그들을 돌본다.

음식을 준비하고,

식탁을 차리고,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한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마당을 쓸고,

나무들을 돌본다.

모두 소소한 일이지만 온종일 일감이 끊이지 않는다.


나는 일주일에 하루 비번을 받는다.

서점이나 영화관에 갈 수도 있고,

연극을 보거나 데이트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

비번인 날에는 당연히 일을 하지 않는다.

일 대신 마당 벤치에 앉아 광합성을 하거나 책을 읽는다.

나는 비번인 날에는 일하지 않는다.


노인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학생들을 가르쳤던 어떤 노인은 그가 학교에서 가르쳤던 학문을 내게 가르친다.

그것은 미학에 관한 가르침인데 내가 이해하기에는 난해한 구석이 많다.

제목은 미학이지만 내용은 철학에 가깝다.

나는 노인들의 가르침을 거부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흡수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세상은 들어도 알 수 없는 지식들로 가득하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을 이해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둔다.

늘 그래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외출을 했다.

드문 일이다.

이유는 없다.

담 너머의 세상을 걷는 기분은 조금 야릇했고, 낯설었다.

나는 도시 중앙을 향해 걸었다.

사람들이 늘어났고, 차들이 늘어났고, 길이 넓어졌다.

길은 넓어졌는데 나에게 주어지는 공간은 점점 좁아졌다.

답답했다.

나는 길가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얕은 턱이 있는 쇼윈도 앞에 앉아 거리를 구경했다.

멋지게 차려입은 청년 하나가 굴렁쇠인양 타이어를 굴리며 거리를 걷는다.

뭔가 멋있어 보인다.

미간을 찡그리며 타이어에 집중하고 있지만 가끔 미소를 짓기도 한다.

내가 보고 있는 내내 그는 단 한 번도 타이어를 쓰러뜨리지 않는다.

노인 하나가 유모차를 끌고 지나간다.

노인의 유모차는 비어있다.

나는 잠시 집 생각에 잠긴다.

노인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

나는 그들이 이 시간쯤 무얼 하는지 낱낱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떠나와 있는 탓일까.

시계를 본다.

이 시각이면 모두들 오수에 빠져있을 것이다.


처음 이곳에 일자리를 소개받았던 날이 떠오른다.

나는 노인들의 느린 걸음걸이와 얼굴의 주름살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이 일을 선택한 이유는 이렇게 간단하다.

그들의 모습은,

나에게 일종의 파동이었다.

바다 위에 떠있는 배가 파도를 피할 수 없듯, 나는 이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나를 소리 내어 부르지 않는다.

호칭이 없다는 의미이다.

가끔 손을 들어 나를 부르는 노인들도 있지만,

보통은 내가 먼저 그들을 따라다니며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이야기를 들어준다.

일하는 날에는,

쉴 틈이 없다.


이곳은 종일 조용하다.

계단이 없으므로 계단 밟는 소리도 당연히 들리지 않는다.

가장 시끄러운 시간은 식사시간이다.

수저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

음식 씹는 소리.

그것이 소리의 전부이고,

이곳에서 가장 시끄러운 소리다.

하지만 그 소리조차 이곳에서는 사랑스럽다.

이곳의 소음에서는 찰진 윤기가 흐른다고나 할까.

이곳에 온 첫날부터,

나는 일상의 소음을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 나는 세상의 한가운데에 있다.

내 발로 걸어서 이곳에 와 있다.

이곳, 즉 바깥세상의 소음은,

지나치게 팽팽해서 언제 끊어질지 모를 낡은 현처럼 불안하다.

외출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눈을 뜨고 창밖을 보니 잔디가 모두 젖어있다.

젖은 잔디는 짙은 녹색으로 환하게 빛난다.

나는 맨발로 마당에 나선다.

물방울이 살을 촉촉이 적신다.

내 살은 노래하고,

잔디는 춤을 춘다.

첫 봄비다.


집의 1층에는, 식당과, 중앙휴게실과, 도서대여실과, 매점과, 직원들의 숙소가 있다.

2층부터 마지막 층까지는 각층마다 세탁실과 휴게실이 있고, 노인들의 숙소가 있다.

너무 노쇠하거나 몸이 아파서 거동할 수 없는 노인들은 벽 너머에 있는 세 번째 집으로 간다.

이곳에는 총 세 개의 집이 있고, 모두 둥글다.

내가 사는 곳은 두 번째 집이다.

그리고 내 방은 1층 복도 우측 제일 끝에 있다.


맑은 날에는 옥상에 빨래를 넌다.

나는 옥상에 빨래 너는 날을 좋아한다.

카트 한가득 빨래를 싣고 집의 테두리로 난 낮은 경사의 원형 오르막길을 따라 옥상에 오른다.

오르막길의 벽에는,

이곳에서 지내는, 혹은 이곳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난 노인들이 그린 그림들이 걸려있다.

어떤 그림은 섬세하고,

어떤 그림은 거칠다.

나는 그들의 그림을 보며 그들의 마음과 지난 인생을 읽는다.

노인들의 그림은 그 어떤 영화나 소설보다 더 재미있다.

집에는 특별활동반이 있다.

그림은 대부분 그림 반 노인들의 작품이다.

나는 이곳 특별활동 반에서 일주일에 두 번 그림을 가르친다.

노인들은 열심히 배우고, 진지하게 그린다.

그들의 그림을 예술장르 중 하나로 굳이 정의하자면,

‘드라마’다.

그렇게 나는 매주 두 번, 한 장의 그림 속에 담긴 긴 드라마들을 본다.


이곳을 짓고 처음 운영하기 시작한 사람은 이른 중년의 나이에 장애가 시작되었다.

태어나서 장애라는 것을 겪어본 적이 없는, 아주 건강한 사람이었다.

장애가 시작된 후로도 그는 여전히 건강했다.

처음 그를 만난 사람은 아무도 그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장애가 발현된 후에도 그는 열심히 일했다.

그는 집 짓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장애가 그에게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장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장애에 휘둘릴 만큼 나약하지 않았고,

부질없는 희망이나 몽상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그는 희망을 잠시 내려놓고 현실을 직시했다.

그리고

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의 집짓기에는 밤낮이 없었다.

그는 달 아래에서 떨며 집을 지었고,

태양 아래에서 땀 흘리며 집을 지었다.

그는 가감 없이 그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나약하지만 진실하고 조용한 사람들이 하나둘 집을 채우기 시작했다.

집에 정착하는 노인들은 모두 장애가 있었지만,

단단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당연히,

집을 지은 이의 얼굴에서는 매일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숙소마다 작지 않은 베란다를 가지고 있다.

노인들을 위한 공간이므로 위험하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집을 지은 이는 방은 없더라도 베란다는 꼭 있어야 한다며 베란다 공사에 정성을 들였다.

그리고 많은 노인들이 베란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자주 꿈꾸는 듯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한 번 떠오른 미소는 꽤 오래 가라앉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정말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소 속의 시선은 먼 곳, 아주 먼 곳을 유영하고 있었다.

태양이 뜨고, 태양이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질 때까지,

그들은 거의 온종일 베란다에 앉아 차를 즐기며 회상에 잠겨 지냈다.

베란다는 노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집을 지은 이를 ‘대장’이라고 불렀다.

그는 나무로 집 짓는 일을 했고,

목수 일에 평생을 바쳐온 대목이었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특별활동 반에서 목공예를 가르쳤다.

집의 테이블과 의자와 가구들은 모두 목공예 반 교실에서 만들었다.

목공예 반은 마치 나무를 다루는 마법사들의 마법교실 같았다.


지푸라기 같았던 노인들도 일단 집에 정착하고 나면

살빛이 살아나고, 희색이 피어올랐다.

집은 고사목 같은 사람도 살려내는 기름진 토양이었다.

집을 감싸고 흐르는 생기가 사람들 안에 스며들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색과 향을 담은 꽃을 피워내었다.

집은 언제나 은은한 향기로 가득했고,

향기는 시시각각 그 향을 바꾸었다.

때로는 모과 향이었다가, 때로는 라일락 향이었다가,

때로는 차 향 같기도 하고, 때로는 풀냄새처럼 싱그러운 향이기도 했다.

노인들에게는 더 이상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 느리게 했다.

대신 정성스러웠다.

노인들은 잠시 피어 아름다움을 빛내고 곧 시들어 떨어지는 꽃같이,

무엇에든 열정적이었다.

그들처럼 사는 것이 인생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마지막 꽃을 피우는 계절에는 모두가 저렇게 진지해지는 걸까?

일하는 날에는 쉴 틈이 없었고,

노인들 역시 쉬지 않고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노인들은 자주 라디오를 듣는다.

정규방송은 아니다.

집에는 방송실이 있고,

식구들 중 누구나 자유로이 방송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멘트 없이 음악만 튼다.

어떤 사람은 클래식 연주를 주로 튼다.

나도 가끔 방송을 하지만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나는 E.L.O의 Midnight Blue나 피아졸라 같은 옛 음악을 주로 튼다.

노인들 중에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많다.

젊은이들의 방송보다 노인들의 방송이 식구들에게 더 인기 있다.

집에서는 식구들 모두에게 라디오와 이어폰을 지급한다.

라디오를 들으며 마당을 거니는 노인들도 많다.

베란다에서 라디오를 듣는 노인들도 많다.

그날의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는 노인은

디제이 명단에 자기 이름을 적어놓고 순서를 기다린다.

자유로운 만큼 다채롭고 싱싱한 방송이다.

집에는 두 개의 라디오 채널이 있다.

첫 번째 집과, 두 번째 집의 채널.

세 번째 집은 육신의 침식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자들의 집이므로

라디오를 들을 수는 있으나 방송을 진행하는 사람은 없다.

어쨌든 노인들은 자주 라디오를 듣는다.


겨울이 지나고 첫 봄 햇살이 내리는 날.

그리고 그 다음 날.

그 다음 날의 다음 날.

그렇게 한 주 내내….

많은 노인들이 세상을 떠난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겨우내 죽음과 투쟁하며 긴장해있던 육신과 영혼이

봄볕 아래에서 맥을 놓아버리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따스한 봄에 죽을 수 있기를 은밀히 기도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산과 들이 녹음으로 물들고,

개울이 힘찬 소리로 흘러내리고,

꽃이 만발하고,

그 향기가 천 리쯤 날아갈 무렵까지 생존한 노인들은,

보통 이듬해 봄까지 삶을 이어간다.

만물이 호흡을 시작하고, 생명이 꿈틀거리며 태동하는 계절.

봄은 찬란하게 사람의 생명을 거두어간다.


노인들에게 들은 그들의 회상법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거꾸로 흘러간다.

즉, 84세의 노인은,

83세.

82세.

81세를 우선 추억하고,

다음 순서로 70대 시절을 추억한다.

그 다음은 60대 시절.

아래로 내려갈수록 무작위로 추억이 시작되고,

시간의 순서는 곧 뒤죽박죽이 된다.

몹시 기뻤거나, 우울했던 기억들을 마구잡이로 끄집어낸다.

그들은 과거를 더듬으면서 수시로 감정의 역류에 휘말린다.

공허함에 빠지기도 하고,

유쾌하게 웃기도 하고,

흥분해서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추억 속의 누군가를 조롱하기도 하고,

정을 나눴던 이들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들의 회상은 회상을 마칠 때까지 내내 진지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남은 날수를 헤아려보다가… 잠이 든다.


때로 인생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가혹하다.

물론 현실은 모든 이에게 가혹하다.

가혹함의 경중은 각자가 가진 인내심의 한계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약한 자에게는 가벼운 고통도 지옥일 수 있고,

강한 자에게는 지옥도 가벼운 고통일 수 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삶이 끝나지 않는 한 안식은 없다는 사실이다.

삶을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중의 몇몇은 그래서,

안식을 위해 자살을 선택한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순리에 의하면,

삶이 죽음에 닿는 길은 멀고멀다.

인간은 시간을 초월할 수 없으므로 당연히

삶과 죽음의 거리를 늘이거나 줄일 수 없고,

그 사이의 어느 한 점 위에 서있는 그저 미미한 점일 수밖에 없다.

자살은 은밀하고 고독한 작업이다.

은밀함의 뿌리에는 고독이 있고,

그 고독을 이겨내지 못한 자는 자살에 실패한다.

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사람에게는 친구가 필요하다.

이곳에서 일하며 나는 많은 친구를 얻었다.

덕분에 이제는 더 이상 자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

그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친다.

하지만 이 친구들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예외 없이 늘,

그들이 먼저 떠나버린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다 달려간 후,

그들이 닿은 땅 끝에 서서 나를 바라보지만,

나에게는 더 이상 그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이별은 너무 빠르다.


벙어리들.

정확히는 벙어리 노인들.

나는 그들과 함께 지내는 고요한 세상을 사랑한다.

아무도 나를 소리 내어 부르지 않지만,

나는 그들 모두를 매일 만나고,

그들 모두와 매일 대화를 나눈다.

나는,

그들이 사는,

그들과 내가 함께 사는,

이 고요한 세상이 진정 사랑스럽다.



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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