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묵상2019. 7. 18. 22:18

https://youtu.be/FZYqojr5fZU

제가 르 클레지오의 작품을 소개한다면, 본래는 사막을 먼저 소개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제가 읽은 클레지오의 작품 중 첫 번째 소설이었구요. 참 좋은 문장들을 많이 만난 소설이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제가 읽은 책이나 읽던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새 책이 아니라 꼭 읽던 책을 주곤 하는데요. ‘사막을 찾다가 제 사촌동생에게 선물한 게 떠올라서 아직 제 곁에 남아있는 홍수를 먼저 소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클레지오가 쓴 서문의 제목은 ‘1966년을 추억하며입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온 해가 되겠죠.

무려 53년 전의 일입니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 소설을 동시대의 사건으로 읽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고, 21세기의 프랑스 니스와 서울, 그리고 파리는 여전히 모순과 불균형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젊은이들은 보호막 역할을 해줄 흉벽조차 없이 현실에 도전하고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제가 바로 유튜브에 저의 목소리와 이야기들을 남기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저의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몸과 영혼이 깨져가며 세상에 부딪치고 있는 청춘들을 위해, 혹은 여전히 성장하려고 애쓰면서, 남은 삶이 정신적으로, 또 영적으로 풍요롭기를 바라며 순례를 거듭하고 있는 중년들을 위한 사색의 공간을 만들어두는 것.이 저의 목적이라면, 같은 이유로 클레지오는 홍수라는 작품을 남긴 것이죠.

 

르 클레지오는 세상을 염려하는 것만큼이나 청춘들을 위한 걱정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작가입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어른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자들이 그래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걱정도 해줘야 하구요. 때로는 그들에게 덮치는 재앙을 온몸으로 막아주는 벽이 되어주기도 해야 하구요. 바로 이런 생각이 자기 몸이 부서지도록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대한민국의 좋은 가장들이 가진 공통점이겠죠.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맨 처음 구름이 있었다.

바람에 밀려와 산등성이에 걸려 지평선에 머무르고 있는, 무겁고 시커먼 구름들이었다. 사방이 어두워졌고, 사물들은 얇은 철판 같고 쇠사슬 갑옷 같은 일정한 크기의 비늘로 뒤덮이면서 얼마 안 남은 빛을 흩뿌려 낭비하고 있었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다른 사물들은 희미하게, 고통스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아직 구체화되지는 않았지만 머잖아 도래할 어떤 어마어마한 사건에 완전히 압도당해 있었고, 이제 전쟁을 치러야 할 이 적과 뚜렷이 대조가 되면서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프롤로그의 이 대목에서는 전운이 감돕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세상과 인간의 전쟁이라는 예감이 들구요. 싸워보나마나 세상의 승리가 당연한 것처럼, 힘의 우위가 대조적으로 그려집니다.

주인공의 상태 역시 이번 전쟁에서는 승리할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나는 회의에 사로잡혔다. 분명히 살아있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혼돈에 사로잡힌 채 나와 나 자신 사이의 그 영원한 괴리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나의 머릿속과 사지는 안개가 낀 듯 흐릿했으며, 끝없이 되풀이되는 의문은 여전히 해답 없이 남아있었다.’

 

다른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침묵은 그의 머릿속과 가슴속에서 요란한 폭포 소리처럼 울려 퍼졌고, 숨을 쉬기 시작하면서 깊은 곳을 향해 서서히 움직여갔다. 이제 소리나 빛깔이 차지할 자리는 없었다. 그날 밤 어둠 속에는 엄청난 침묵, 물질에 달라붙은 침묵, 끈적거리는 동체를 지닌 끔찍하고 거대하고 차가운 침묵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텅 빈 방에 홀로 남은 당신을 고통으로 신음하게 만들어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가는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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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라는 작품도 같은 느낌이었지만, 클레지오의 글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합니다. 그것이 제가 르 클레지오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제가 고른 다른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빛이 그의 머릿속으로, 마치 이번이 처음이라는 듯 쏟아져 들어왔다. 빛은 그의 머리를 불사르며 용암같이 뜨거운 혀로 그의 뇌를 가득 채워 그 속을 완전히 비워냈다. 하얗고 단조로운 소리가 조금씩 몸속으로 들어오면서 그를 지면에서 떼어놓았다.’

 

어딘가 끔찍한 구석이 있는 곳이었다. 고독과 비참, 노화 혹은 그 비슷한 것들을 의미하는 곳이었다. 진흙탕과 오물로 뒤덮인 그 차가운 물줄기를 마주한 채, 도시는 무겁게 버티고 서서 창문이 뚫린 건물 벽들을 통해 난폭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던 베송은 자신이 두 적이 마주보며 대치하고 있는 지점, 바로 그 경계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사막의 경우도 그렇습니다만, ‘홍수라는 작품 역시 비슷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파멸이라는 상태가 과연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어야 하는가...?

망했다는 상태가 그 자체로 인생의 끝이고, 모든 희망을 버려야하는 상태인가? 하는 것이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국내 굴지의 출판사 디자이너가 제대로 쉴 수도 없는 휴식시간이라는 조항에 사인을 하고, 최저 시급도 못 받는 경비원이 되었다고 해서 삶의 희망을 놓고 세상의 물살에 떠내려가는 것이 삶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작가는 작품 속의 현실과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지금은 밤의 장벽 저편이다. 이제 죽음이 임박한 듯하다. 만물을 얇은 재의 장막으로 뒤덮을 더럽고 축축한 죽음이.

점점 죄어오는 이 바이스 속에서 자신들의 조건과 운명을 망각하듯, 남자들과 여자들은 살아가기를 그만두었다.‘

 

또 다른 묘사를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도망갈 수가 없다. 땅 위에는 위험이 만연해있다. 하수구들을 통해, 지하실을 따라 그 위험이 둔탁하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은 위험이다. 그것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지옥, 너무 가까워서 지하실에 난 환기창을 통해서도 들어갈 수 있는 지옥이다.’

 

. 이런 지옥에 던져진 채 마지못해 생존해가는 인간의 삶에 과연 어떤 의미가, 어떤 그럴싸한 의미가, 어떤 긍정적이고 좋은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요?

 

작가는 이 작품의 에필로그에서 아주 작은 소리를 내는 짧은 문장으로 삶의 의미를 읊조립니다. 그 대목만큼은 여러분들의 작은 행복을 위해서 여기에서 읽지 않고 소리 없는 소리로 남겨두겠습니다.

 

오늘은 프랑스 문학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르 클레지오의 홍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이제는 노인이시지만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글을 쓰고 계시구요.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생의 정점을 파고드는 문장들로 이 분의 글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감사합니다.

 

르 클레지오. ‘홍수’.  신미경 옮김. 문학동네

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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