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불면인2019. 3. 30. 16:22




인기척


나는 흐르는 물처럼 쉼 없이 움직이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고, 갈 곳 없이 막힌 물처럼 고인 채 썩는 사람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어이없게도 흐르지도 않고 고이지도 않는 소외된 물기둥이 되어버렸다. 바라는 바가 명확하지 않으면 혼돈과 착오의 시기가 도래한다. 나는 그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나는 내 삶에서 조연으로 밀려나있었다. 내 삶인데도 내 삶에서 제삼자가 되어있는 것이다. 마치 해수에 잠긴 듯 짭조름한 습기가 온몸을 뒤덮은 순간, 나는 내 몸의 생존에 꼭 필요한 마지막 숨을 빼앗긴 듯 답답함을 느꼈다. 호흡부전. 죽음이 저만치서 내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잠결이었지만 나는 그의 발자국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낯설지 않았다. 내 인생의 무늬를 그릴 자격을 박탈당하고 남의 손이 나를 그리도록 방관하고 있어야하는 신세. 숨이 정지했다.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죽음으로 내 삶이 살아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꿈 | 목소리


당신이 누구에게 손을 내밀든.

그 손에 무언가 쥐어지든,

빈손으로 돌아오든,

결국 당신 곁에 끝까지 남아있을 것은 당신 몸뚱이 하나,

오직 당신 자신뿐이다.

목소리는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선명하다.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죽은 나무의 껍질처럼 부서질 듯 단단하다.

속은 마르고 피는 흐름을 멈추었다.

무엇이 나에게 사망을 선고할 것인가.

나는 산 자인가, 죽은 자인가.

숨 쉬는 일조차 관성이 되어버린 삶.






조우


겨울을 날 때면 늘 그랬듯, 이 겨울에도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가 보다는 내가 어느 시간 어느 날에 있는가를 먼저 느끼곤 했다. 겨울은 늘 춥고 대부분 추운 계절이지만 내 몸이 닿아있는 곳은 늘 차가웠으므로 나는 늘 부스럭거리는 몸을 입은 채 두 귀로 아침을 맞이했다. 발자국과 발자국과 발자국과 발자국 소리. 그 발자국들의 소리 가운데에서 나는 가끔 여린 짐승의 호흡하는 소리와 어린 나무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밤은 길었고 수면은 짧았다. 꿈이 지배하는 수면은 휴식도 잠도 아니었다. 나는 가끔 고양이들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어쩌면 고양이들이 내 품에 안겨 잠들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먼저 누구의 품에 안겼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우리는 함께 잠드는 날이 많았고, 늘 고양이들이 나보다 먼저 일어났다. 고양이와 함께 지내면서 나는 고양이가 소리로 세상을 지각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걸 알았다. 같은 소리라도 어떤 소리가 자신에게 우호적인지, 어떤 소리가 적대적인지를 알아내는 능력. 나는 곧 고양이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었고, 나 역시 고양이처럼 소리에 민감한 사람이 되었다. 거리의 삶이 궁금하다면, 거리에서 살고자 작정했다면, 길에서 먹고, 자고, 걷고, 오래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고양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다. 고양이들은 길 생활의 선배이자 친구이고, 심지어 사람의 지배를 거부하면서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공존하는 유일한 길 위의 짐승, 곧 사람이 아스팔트를 깔기 이전부터 길을 점령하고 살아온 길 생활자들, 혹은 길 생존자들의 조상이자 길 그 자체니까. 나와 오래 친구로 지냈던 한 고양이는 내게 아파트 화단에 숨어 몸을 웅크린 채 기다리다가 아스팔트 위로 먹이를 주우러 오는 참새나 비둘기를 사냥하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물론 나처럼 움직임이 둔하고 인간과 새들의 눈에 잘 띄는 덩치 큰 짐승에게는 별 쓸모없는 생존법이었지만 내가 지켜보고 잘 배우기를 바라는 녀석의 심중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녀석은 다섯 번 중에 한 번 정도 사냥에 성공했는데, 녀석의 사냥을 함께 축하하기에는 잡은 고기가 너무 작았고, 생식을 하는 녀석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죽은 사냥감의 털을 뽑거나 가죽을 벗겨주는 일뿐이었다. 녀석은 내가 머물던 거리에서 대장노릇을 하는 고양이였고, 가끔 신세 아닌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예를 들어, 중앙난방인 아파트의 지하실 중 어느 칸에서 보일러가 돌아가는지를 가르쳐준다든가 하는 고마운 일>, 비둘기를 사냥하려고 아파트 화단에서 뛰쳐나오던 순간에 주차장을 가로지르던 수입 지프차의 광폭타이어에 치여 죽었다. 녀석은 자신의 몸을 그대로 바쳐 길과 하나가 되었다. 나와 함께 지낸지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고, 태양이 희미했던 날이었다. 길 위의 삶은 고단한 것이다. 납작해진 고양이의 시신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납작해지지는 않더라도 이 고양이에게처럼 길 위의 모든 생존자들에게 고루 닥쳐올 죽음에 대해서. 고양이의 시신 앞에서 나는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잠자리를 옮겨도 내게는 여전히 새로운 고양이 친구들이 생겼다. 고양이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리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다. 같은 사람의 발자국 소리조차 그때그때의 심경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낸다. 시시각각 색을 바꾸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로 나는 요일을 직감했다. 땅을 누르는 울림으로 연주되는 현란한 랩소디. 이른 아침부터 스타카토 연주가 시작되면 월요일이다. 굳이 요일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나을 때가 많았다. 평소보다 늦게 연주가 시작되는 날엔 어김없이 비가 내렸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나는 꿈을 꾸었다. 어디론가 떠나는 꿈은 늘 행복했지만 가끔 우울하기도 했다. 톡톡. 톡톡. 톡. 톡. 톡… 빗소리가 들린다. 그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오늘은 라르고일 거야’ 나는 생각했다. 똑. 똑… 또옥똑… 똑똑. 빗소리는 분명 아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려온다. 똑똑… 똑똑똑… 똑똑. 깊은 물속에서 한참을 헤엄쳐 올라온 기분이다. 몸은 실제로 충분히 노곤하다. 똑똑… 똑똑. 의식이 수면 속의 수면을 벗어나면서 나는 이것이 꿈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님을 겨우 알아차렸다. 누군가 엉덩이로 깔고 앉은 듯 온몸이 무거웠다.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여자가 서있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놀라기에는 지나치게 가수면 상태다. 나는 잠의 동굴에서 갓 기어 나온 사람답게 아래에서부터 역방향으로 여자의 그림을 훑어본다. 검은 단화. 진회색 바지. 촌스럽지만 단정한 옷차림. 연필로 그린 초상화처럼 창백한 입술. 마른 볼. 가벼운 미소. 완벽한 소박함이란 게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짓는다. 평화로운 풍경 앞에서는 누구나 평화로움을 느끼게 마련인 것이다.

나는 이제 두렵지 않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이 두렵다. 살아있는 모든 것. 인간의 얼굴을 가진 모든 것. 인간을 두렵게 하는 모든 것. 심지어는 주방이랄 수도 없는 포장마차의 좁은 선반 위에서 가늘게 양파를 썰어내는 마른 여주인의 여린 팔뚝조차도 두렵다.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다. 사람들의 날 선 눈동자와, 어두운 시선과, 살기 가득한 눈알을 번득이며 손에 칼자루를 든 자들도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가진 몸이 시체인 자에게 귀신이 두렵지 않은 것처럼. 스스로 귀신인 자에게 밤이 두렵지 않은 것처럼. 삶은 늘. 그렇다. 채워져 있을 때는 밀어내고, 여백이 넘칠 때는 채우려는 본능. 나는 비어있었고, 나와 조우했던 사람들은 모두 얼려놓은 동태 알처럼 허무와 공허로 가득 차 있었다. 결코 생명이 될 수 없는 얼음조각 같은 존재. 우리는 그저. 서로를 알아보았다. 몹시 가볍게도. 거리의 냄새나는 마른 육신과 낡은 청소부의 유니폼으로.


“혼자 무언가를 하는 데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게 더 어색하군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외롭지 않은가요?”

“외롭다기보다는. 자유롭죠. 지루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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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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