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하다고 할 수 있을만한 벽이었다. 벽의 가운데에는 흰색 페인트로 말끔하게 24hours 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바로 아래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번호는 몹시 사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오직 호기심을 자극하는 냄새 때문에 실제로 전화를 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담에. 담벼락에 말이에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어요.”

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전화를 정말 받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는데, 전화를 받으시네요.”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24시간 동안 뭘 하신다는 건지, 아니면 24시간 동안 뭔가 해주신다는 건지…, 궁금해서요.”

여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제 대답을 기다릴 차례니까.


하지만 전화 저편의 세상은 조용했다. 전화를 받은 것은 분명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자는 소리 나지 않게 천천히 침을 삼켰다. 여전히 귀는 건너편 세상의 응답을 기다리며 수화기에 바짝 눌려 있었다. 30초쯤 흘렀을까. 드디어 저편의 세상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이거나 냄비 뚜껑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소설을 써드립니다. 24시간 안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긴장이 풀리면서 여자는 귓바퀴에 땀이 찼다는 걸 알아차렸다. 소설을 써준다? 무슨 소설을? 왜?

“이야기를 들려주셔야 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요.”

남자의 목소리는 차갑고, 부드럽고, 가라앉아 있었다.

여자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무 이야기라도 괜찮나요? 실제로 있었던 일이기만 하면요?”

여자가 저편 세상의 남자에게 물었다.

“긴 이야기일수록 좋습니다만.”


여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야기를 해주면 소설을 써준다. 그런데 반드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야 한다. 조건은 그것뿐이다. 실제로 있었던 일. 그런데 나에게 소설이라는 게 필요한가?


“저는 두 남자와 동시에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어요.”

어쨌든 여자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남자와는 정신적 교감을 나눴고, 다른 남자와는 육체적 교감을 나눴어요. 저를 대하는 두 남자의 태도가 각각의 세상에 완벽하게 어울렸기 때문에 저는 죄책감을 느낄 겨를이 없었어요. 두 세상이 분리된 채로 존재해주기만 한다면, 마치 기차 레일처럼 동시에 말이에요, 저는 가장 완벽한 행복을 누리는 여자로 살 수 있었을 거예요.”

수화기 저편의 세상은 여전히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여자는 담벼락을 쳐다보았다. 담은 여자 키의 세 배는 될 듯해 보였다. 24hours. 24시간 후에는 여자의 소설, 혹은 여자를 위한 소설이 생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래, 단지 이야기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두자.

“끝인가요…?”

가라앉은 남자의 음성이 울렸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욕심 때문이었겠죠?”

여자가 말을 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저는 두 사람과 함께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동시에 한 공간에서 말이에요. 완벽한 두 별이 만나서 하나의 커다랗고 완벽한 별이 되길 바란 거죠.”

저편의 세상은 다시 고요해졌다. 여자는 천천히 벽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초저녁 어스름 사이로 자갈 밟는 소리가 나른하게 울려 퍼졌다. 벽 앞에 선 여자는 몸을 돌린 후 쓰러지듯 벽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제 소원과는 달리 두 별 모두 박살이 나서 먼지가 되어버리더군요.”


남자는 자신의 고독을 ‘자신이 감지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고독’으로 정의했다. 그것은 킬케골의 것처럼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죽음의 문턱에 닿을 만큼은 심각한 것이었다. 남자가 자신의 고독을 다스리는 해법은 ‘사람의 소리’였다. 작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는 그에게 고독이라는 잡초를 분쇄하는 소의 어금니 같은 것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남자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의 꼬리를 따라가며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들을 지어냈다.


오늘 밤에는 여자에게 줄 소설을 써야 한다. 남자는 전화를 끊고 가스레인지 위에 물주전자를 올렸다. 어느 쪽으로 부터든, 혹은 양쪽으로부터 버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절반의 행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 토막’이라는 것은 곧 불구이며, 완벽히 불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몇 개의 모서리를 가진 도형이든 모서리가 깨지기 시작하면 선으로, 혹은 점으로 추락한다. 그러나 남자는 이 여자의 이야기만큼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남자는 의자에 앉아 빈 종이 위에 제목을 적었다. ‘눈사람 모양을 닮은 행성’.


커피 잔에 두 알의 각설탕을 넣었다. 남자는 여자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그렇게 저는 혼자 남았고…, 외로워요.”



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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