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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8 . 뒤돌아보기의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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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분명 내가 아는 누군가의 손이다. 뒤를 돌아보기가 문득 두렵다. 내가 이곳에 와있는 것은 아내도 어머니도 모른다. 가족들이 아는 것은 내가 어디론가 떠났다는 사실뿐이다. 나의 행선지를 끝까지 모르기를 얼마나 오래 기도해왔는지 모른다. 몰라야한다. 아무도 몰라야한다. 빛 아래에서는 빛의 가루로 쪼개져 숨고, 암흑 속에서는 묵은 먼지가 되어 숨어야 한다. 숨고 사라지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이제는 희귀해져버린 증발의 미덕으로. 그러나… 그러나…, 나의 증발로 인해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에 잠길 사람들이 있고, 그러니 나는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하고, 돌아가려면 정해진 여정을 거쳐야 한다. 그나저나 이 손의 주인은 누구일까.


등에 땀이 고였다. 도시에 상륙한 폭풍우는 북쪽에서 내려온 찬 공기를 만나 얼어붙을 듯 얼어붙지 않는 잔인한 냉기로 도시를 점령해버렸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내 등 뒤에 누군가가 서있어서는 안 되는가. 내 어깨를 두드려서는 안 되는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누가 됐건 고작 사람이지 않은가…. 생각이 정리되자 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나의 어깨를 두드린 자의 얼굴과 마주섰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노파가 서있었다. 아주 작고 늙은 노파였다. 노파의 얼굴에는 낯선 주름살이 흐르고 있었다. 아쉽게도 내가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노파라…. 얼굴과 피부색을 봐서는 이 도시의 사람이 아니었다. 노파는 내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어차피 이 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는 나 자신이 이미 모험이었으니 노파를 따라나서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노파의 우산은 비를 가리기에는 너무 작아보였으나 안타깝게도 노파의 몸은 작은 우산으로도 충분히 가려질 만큼 작았다. 나는 마치 조로병에 걸린 일곱 살짜리 꼬마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비는 거세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노파가 걱정되었다. 잠이 덜 깬 너구리의 걸음걸이가 저런 모습일까? 노파의 걸음은 보도블록 하나만 뒤틀려도 넘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꽤 오래 걸었다는 생각이 들 즈음, 노파는 걸음을 멈추고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놀라웠다. 노파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신기하게도 주유소가 있었다. 노파는 볼 일은 봐야하지 않겠느냐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젖은 인도 위에 오뚝이처럼 서있었다. 볼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눈치였다. 나는 등유 5리터를 샀다. 난로를 판 장사꾼은 1리터만 넣어도 한 달은 뗄 거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우습게도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은 마음으로 5리터의 등유를 샀다. 나는 다시 노파를 따라나섰다. 온 만큼의 거리를 더 걸었음에도 노파의 걸음걸이는 여전히 잠이 덜 깬 너구리의 그것이었고, 그 변함없는 항상성에 이제 나는 묘한 안정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대로를 벗어나 골목길로 들어섰다. 이 도시의 골목들은 완벽한 미로의 구조를 지니고 있었고, 그러므로 일단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안내를 받지 않고는 빠져나오기 어려웠다. 나는 골목의 모퉁이를 지그재그로 걸으면서 나올 때도 당연히 노파가 안내해주겠지 생각하며 마음을 편히 먹으려고 노력했다. 기름통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걷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무거워졌다. 나는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가며 통을 들었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통과하자 길쭉한 골목이 나왔다. 노파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더니 이제 다 왔다는 눈빛을 보냈다. 목적지는 긴 골목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