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10 . 초대

*

골목 안의 집들은 모두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대문의 너비, 창의 위치, 벽돌의 색깔, 심지어 벽돌과 벽돌 사이의 간격까지 모두 똑같다. 번지수 없이는 편지가 제대로 배달될 수 없는 구조다. 노파는 골목의 끝까지 걸어간다. 마지막 집 앞에 선 노파가 나에게 문을 밀라는 시늉을 한다. 나는 우산을 접고 한 손으로 대문을 민다. 열리지 않는다. 나는 기름통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대문을 민다. 끼긱끼긱, 통나무여서 그런지 꽤 육중하다. 끼긱끼이익, 나무가 비틀어지는 소리를 내며 겨우 대문이 열린다. 짧은 터널 모양의 현관 너머로 마당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마당은 작지만 아늑하다. 마당 안으로 떨어지는 비와 낙숫물의 모습이 그림 같다. 마당 주위로는 크고 작은 화분들이 가득하다. 이 집의 주인은 화초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비가 잦은 곳이니 물을 줘야하는 번거로움은 없을 것이다. 마당의 바닥에는 파쇄석이 깔려있다. 비에 젖은 짙은 회색 돌들이 우중충한 하늘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큰 통유리 너머로 거실이 보인다. 거실은 자그마하지만 꽤 큰 탁자가 놓여있다. 마당을 등지고 앉아있는 사람은 책을 읽고 있는 것 같다. 노파는 마당 옆에 우산을 접어두고 거실로 들어간다. 가스레인지 위에 주전자를 올리는 걸 보니 차를 끓일 모양이다. 노파는 내게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마당 한편, 노파의 우산 옆에 쓰고 온 우산을 접어두고 거실로 들어간다. 거실 벽은 흰색과 회색과 검은색 타일로 깔끔하게 꾸며져 있다. 벽에는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다. 안쪽으로는 단출한 주방시설이 있다. 개수대와 작은 선반, 가스레인지가 전부다. 거실 한 쪽으로 방과 이어지는 방문이 있고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안이 들여다보인다. 벽 하나가 책으로 가득 차있다. 거실의 남자는 머리가 반백이지만 얼핏 봐도 노파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남자가 들여다보고 있는 책은 꽤 큰 판형의 사진집이다. 펼쳐져있는 페이지에서는 거대한 어미고래와 아기고래가 바다 속을 유영하고 있다. 남자의 얼굴빛은 붉고, 여기저기 검버섯이 피어있다. 오뚝하게 선 콧날이 견고해 보인다. 탁자 한가운데에는 낮은 촛대가 놓여있고, 굵은 초의 꼭대기에서는 불꽃이 흔들리고 있다. 내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순간, 녹아내린 초의 모서리에서 촛농이 흘러내린다.

“멀지 않던가?”

마른 음성이다.

“지루하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놀라지 않는군.”

생전 처음 발을 디딘 도시에서 낯선 얼굴을 찾아 집으로 데려올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나는 남자가 나를 부른 이유보다 방에 꽂힌 책들이 더 궁금하다. 노파는 투박하지만 단아한 모양의 찻잔에 차를 우려낸다. 세 잔인걸 보니 노파도 합석할 모양이다. 실내에서 본 노파의 모습은 밖에서 본 것과 달리 올곧고 건강해 보인다. 등에는 뼈가 굽은 흔적조차 없다. 잠시 후 내 앞에 차 한 잔이 놓인다.

“어머니가 자네를 궁금해 하셨네.”

남자가 말하는 어머니는 아마도 저 노파일 것이다. 나는 오히려 노파가 나를 궁금해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노파는 자리에 앉아 내 얼굴을 유심히 살펴본다. 신기하게도 나를 보는 노파의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다. 나는 찻잔을 들어 차를 맛본다. 무슨 차인지는 모르겠으나 향이 그윽하다. 거실 창밖으로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마당에 놓인 화분 중 몇몇에는 꽃이 피어있다. 짙은 선홍색으로 핀 꽃이 유난히 눈에 띈다.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가늘게 꽃잎이 흔들린다. 화분의 대부분은 다육식물이거나 선인장이다. 사막을 가까이 둔 도시다운 화단 풍경이다. 대문 옆 작은 방의 문 위에는 꽤 큰 생선뼈가 걸려있다. 선장이 잡아온 생선을 손질해서 뼈만 말려둔 모양이다. 나쁘지 않은 장식이다. 내 시선이 생선뼈에 걸려있는 동안 선장은 혼잣말하듯 친구 이야기를 꺼낸다. 바다에서 친구를 잃은 모양이다. 그 정도의 불운은 거친 바다에서 꽤 흔한 일이기에 크게 낙심하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그의 낯빛은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그날도 비가 내렸다고 한다. 풍랑이 심하지 않았기에 비를 맞으면서 조업을 강행하고 있었는데 미끄러운 갑판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여럿이 일하는 갑판 위에서 사람 하나쯤 사라진 것은 크게 티가 나지 않는 법이다. 게다가 선원 모두가 일과 피로에 시달린 상태라면 자신의 손놀림에만 집중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노파는 뜨거운 차를 호호 불어가며 홀짝인다. 선장의 눈동자는 어머니를 닮았다. 색은 다르지만, 눈동자가 맑고, 눈동자와 흰자위의 경계가 선명하다. 불이라도 뿜을 듯 힘 있는 동공의 육중함도 그렇다.

“괜찮다면 저녁식사를 함께 하세.” 선장이 말한다.

선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파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으나 노파는 엉뚱하게도 책장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 책을 한 권 뽑아온다. 노파가 내게 책을 내민다. 첫눈에 보기에도 오래된 책이다. 겉장은 낡았고, 속지는 갱지다. 낡고 긁힌 커버는 제목을 읽어내는 일을 방해한다. 집안의 가보쯤으로 여겨지는 자태를 지닌 그리 오래 묵지 않은 고문서의 모양새다. 처음 몇 장을 읽어본다. 자연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선장의 넋은 다시 사진집 안의 검은 물속으로 사라진다. 노파는 찻잔에 다시 뜨거운 물을 채우고 호호 불어가며 차를 마신다. 노파가 건넨 고문서가 풍기는 종이 향이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