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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16 . 노파와 감자, 평안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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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간다. 아마도 이미 자정을 넘겼을 것이다. 나는 탁자에 앉은 세 사람이 차를 몇 주전자 째 마시고 있는지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선장의 시선은 사진집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가서고 있었다. 나는 지루해진 틈을 타 기지개를 켰다. 몸이 고사목의 껍질처럼 버석거렸다. 노파는 난로 위에 감자 몇 알을 올려놓았다. 나는 마치 먼 길을 느리게 달리는 낡은 대륙횡단열차 안에 앉아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거실은 내가 머무는 객실이고, 노파는 깐깐한 얼굴의 매점 주인이다. 선장은 내 맞은 편 좌석권을 가진 사람이며, 그는 지금 자기 자리에 앉아 활자가 최대한 절제된 한 권의 그림책을 보며 소일하고 있다. 매점 주인인 노파는 조금 전에 난로 위에 감자를 올려놓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저 뻣뻣하게 마른 사나이는 분명 텍스트의 미덕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일 게다. 그러니 저 나이에 저런 그림책이나 보고 있지…. 매점 할미는 너무 작고 빼빼 말랐다. 악덕상인은 아닐지라도 손해 보는 장사는 절대 안 할 것 같아 보인다. 자기 가게 점원에게 월급을 내줄 때도 일한 것에서 단 1원도 더 주는 일이 없을 구두쇠 노인네. 그래도 여전히 대륙횡단열차가 운행 중인걸 보면 이 나라의 정치인들이 매일 파티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아직까지는 큰 사고 없이 잘 달리고 있으니까. 나라에는 전염병이 없고, 국민들은 태평하게 끼니때마다 뭘 먹을까를 생각하는 게 인생최대의 고민이고, 채소 값은 적정선에서 더 이상 오르지 않고, 싼 값에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소요나 반란도 없으니 그야말로 태평성대다. 글쎄, 하지만 나는 열차를 탄 적이 없다. 그리고 노파는 구두쇠라기보다는 단호한 엄격함을 갖춘 예의 바른 사람이었고, 자상함과 유머까지 겸비한 꽤 훌륭한 요리사였다. 게다가 화초도 잘 돌보지 않는가. 나는 오히려 선장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무슨 공부를 했는지, 어릴 땐 어떤 아이였는지, 지금은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왜 바다에 일찍 나가지 못해서 안달인지. 내가 선장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은 마른 얼굴과, 마른 음성을 가진 뱃사람이라는 것뿐이었다. 문득, 선장이 만약 하나님의 집 마당에 있는 우물이었다면 저토록 메마르게 내버려두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노파가 감자를 뒤집었다. 두 사람은 전혀 피곤해보이지 않았다. 책은 여전히 비옥한 사막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책에 쓰인 대로라면 사막은 여러 부족이 공유하고 있었고, 그들은 다툼 없이 평화로웠다. 그들은 그 해에 경작할 작물과 과일을 부족별로 배분하고, 거둬들인 곡식은 각 부족민의 숫자에 따라 알맞게 나눠 먹었다. 그들은 결핍이라든가, 전쟁이라는 말 자체를 알지 못했다. 그렇다. 풍요로운 자가 먼저 시비를 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의 맥박은 평안했다. 한 번도 전투나 사냥을 위해 요동쳐본 적 없는, 호수처럼 잔잔한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었다. 부족의 사내들은 마치 여염집 어머니들처럼 온유하고 양순했다. 그들은 남성보다는 여성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당시의 사막은 어머니들의 세상이었다. 어머니로서의 대지, 어머니로서의 인간, 어머니로서의 결실, 어머니들로 이루어진 군락 속에서의 나눔…. 결국 그들은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준비되어있지 않은 종족이었다. 그들에게는 애초에 바깥세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에 전쟁이라는 낱말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제 이곳에서의 볼일을 다 본 것인가. 아니면 노파는, 혹은 선장은 내게 더 할 말이 있는 것일까. 노파와 선장은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밤의 정적은 더할 나위 없이 깊었다. 객실 창가를 뚫고 들어오던 파도소리가 문득 그리웠다. 노파는 작은 집게로 감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가끔 난로 아래로 떨어지는 감자가 마룻바닥과 부딪는 소리가 그나마 소리랄 수 있는 소리였다. 나는 일어서서 거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가랑비가 어깨와 머리카락을 적셨다. 정적이 지루하여 소리를 찾으러 나왔으나 마당에서도 소리는 찾을 수 없었다. 밤공기가 쓸쓸했다. 사막도 이렇게 조용할까… 사막의 사람들은 잠들어있을까… 사막은 춥지 않을까… 가볍고 작은 손이 어깨를 두드렸다. 노파가 들고 있는 작은 접시에는 구운 감자 두 알이 담겨 있었다. 나는 고맙다는 눈인사를 하고 접시를 받아들었다. 감자는 따뜻했다. 나는 감자를 집어 들고 껍질째 한 입 베어 물었다. 뜨겁고, 고소했다. 껍질이 타지 않도록 잘 구워낸 감자. 노파는 마당 한구석에 놓인 상자에서 감자 몇 알을 더 꺼냈다. 어두운 상자 안에서 나온 감자들은 아마도 빛과 자유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곧 불 위에 앉게 되겠지. 자유는 숨 쉬는 존재들의 특권이니 감자들이여, 자유의 달콤함에서 혀를 거두어라. 선장은 바다 구경을 마친 모양이었다. 그는 책을 덮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다음 책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마당 위 작고 네모난 하늘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바람은 아주 작은 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지만 알아듣기에는 너무 작은 소리였다. 옆구리로 냉기가 스며들었다. 나는 거실로 돌아가 난로 앞에 앉았다. 작은 난로였지만 화력은 훌륭했다. 타닥. 타다닥. 자장가처럼 장작이 타들어갔다. 나는 아마도 그렇게 난로 앞에 앉은 채 잠이 든 모양이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 속. 꿈의 세상조차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