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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17 . 사막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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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봄의 것을 닮아있었다.


잠에서 깬 사람들의 눈동자는 유리처럼 맑았다. 우주의 회전이 멈춘 듯 조용한 밤이었고, 사람들의 꿈조차 연기처럼 고요했다. 사람들은 거처를 떠날 준비를 했다. 짐을 정리하는 움직임은 침착했다. 족장은 사람들의 수를 세었다. 비어있는 자리의 허전함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은 족장의 뒤를 따라 길을 나섰다. 아무도 소리 내지 않았다. 그들은 소리 내는 법을 잊은 사람들처럼 조용히 젖은 모래 위를 걸었다. 자그락거리는 모래 밟는 소리만이 사막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먼 길이었다. 비와 구름은 여린 빗방울과 안개로 대기를 감싸고 불같은 태양의 기운을 막아주었다. 행렬의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누구의 얼굴에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대열의 제일 마지막에 선 자는 동물의 가죽과 새의 깃털로 장식된 작은 북을 느리게 두드리며 걸었다. 행렬의 보폭은 자로 잰 듯 일정했다. 북이 울리는 순간에 발이 모래에서 떨어졌고, 울림이 가실 무렵에 다시 모래 위에 닿았다.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주리거나 갈증을 느낄 때마다 고개를 들어 빗물을 받아마셨다. 그들은 7일 밤낮에 걸쳐 침묵의 행진을 계속했고, 마침내 강의 어귀에 닿았다. 모두가 굶주려있었지만 얼굴은 맑게 빛났고, 눈동자는 선명했다. 그들은 강가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비 내리는 강가는 쓸쓸했다. 강바람은 차가웠고, 사람들은 몸을 움츠렸다. 별이 사라진 밤. 족장은 잠들지 못한 채 밤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강은 소리 없이 빗물을 거둬들였다. 강으로 흘러든 사막의 빗물은 그대로 강이 되어 강의 길을 따라 흘러내려갔다. 족장은 강가에 앉아 떠난 영혼의 흔적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날의 비는 족장에게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홀로된 영혼의 슬픔이 모래바람처럼 거칠게 가슴을 할퀴었다. 족장은 팔을 뻗어 강물에 손을 담갔다. 강은 족장에게 영혼의 소식을 전했다. 영혼은 단 한 방울의 슬픔도 강에 뿌리지 않고 떠났구나. 그걸 평생 짊어지려고 하는구나. …… 가여움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족장은 강물에 손을 담근 채로 밤새 흐느껴 울었다. 사람들은 아무소리도 듣지 못했다.


거처에 닿을 무렵이 되자 비가 멈췄다. 늦은 오후였다. 구름은 사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쪼개진 구름 사이로 스러지는 태양의 그림자가 보였다. 영혼은 태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의 표시였다. 태양은 마지막 남은 뜨거움으로 영혼을 감싸 안았다. 따스한 기운이 영혼을 휘감았다. 태양은 영혼의 젖은 마음을 데우고, 젖은 살과 젖은 옷을 말려주었다. 태양은 영혼에게 다가올 미래를 축복했다. 태양과의 이별을 마치자 어스름이 세상을 덮었다. 사막의 지평선이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영혼은 구멍바위의 한가운데에 앉아 빛의 끝이 세상에 남기는 여운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이 떠난 자리의 반대편에서 샛별이 떠올랐다. 유난히 밝은 샛별이었다. 구멍바위의 한쪽 벽 아래 웅덩이에는 사막의 사람들이 남기고 간 빗물이 남아 있었다. 영혼은 양손을 모아 빗물을 한 움큼 떠마셨다. 이제껏 마셨던 어떤 빗물보다 달고 맑았다. 샛별이 곧 사막 저편의 달을 지평선 위로 끌어올렸다. 가늘게 빛나는 달이 온화한 미소로 영혼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했다. 달의 미소가 밤새 하늘을 지켰다. 영혼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별로 뒤덮인 검은 하늘 위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그리며 그들의 남은 생과 사막에서의 삶을 축복했다. 은하수가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영혼은 은하수를 보며 강을 떠올렸다. 슬픔을 강에 묻지 않은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고. 슬픔을 메고 가는 영혼이라야 슬픔에 갇힌 다른 영혼을 품을 수 있을 거라고. 영혼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하늘에 그렸다. 아버지에게 다가올 사막에서의 안식이 평화롭기를…. 그가 나로 인해 슬퍼하지 않기를…. 영혼은 아버지와 사막의 사람들을 위해 오래 기도했다. 달이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지평선에 닿은 샛별이 반짝! 힘차게 빛을 냈다. 여명이 밝기 전, 영혼은 바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