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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15 . 어제의 어제처럼, 어제의 먼 어제처럼, 그 머나먼 어제의 어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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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위로가 아직 끝나기 전에,


비의 위로만으로는 위로받지 못하는 영혼이 있었다. 영혼은 비의 때가 깊어진 후에도 하룻밤조차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비의 나날들이 이어질수록 슬픔은 더욱 깊어졌다. 영혼은 원망할 대상도 허락받지 못했다. 기도라도 해보려고 입술을 열어보았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관을 짤 나무조차 구할 수 없는 사막에서 영혼은 마치 자신이 관 속에 든 시체 같다고 느꼈다. 존재한다면 분명 목적이 있을 텐데, 존재하지만 삶의 이유가 없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느꼈다. 갈림길에서는 하나의 길을 선택할 수 없을 때 다른 길을 선택하면 된다. 그러나 이 가여운 영혼에게 주어진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매일이 눈물이었다. 비에게 고마운 것은 눈물을 감출 수 있게 해준다는 것. 영혼은 구름을 보며 구름을 부러워했다. 안개를 보며 안개를 부러워했다. 이슬을 보며 이슬을 부러워했다. 영혼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모든 존재들을 부러워했다. 사람에게 주어진 날수는 짧은 것이지만, 영혼에게 주어진 날수는 영원에 가까울 만큼 긴 세월이었다. 영혼은 그 기나긴 고통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빗줄기가 다시 굵어진 어느 날 밤, 영혼은 잠자리를 걷어두고 강을 향해 걸었다. 사막을 건너 강을 향해 걷는 동안 영혼은 기도했다. 이제까지 사막도 강도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한 가지를 자신에게 허락하기를. 나의 날수를 내 손으로 정할 수 있기를. 강에 닿는 그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이기를. 강에 닿기까지 영혼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비는 영혼을 위로하기를 멈추지 않았으나 영혼을 가둔 슬픔, 그 껍질에조차 닿을 수 없었다. 긴 하루가 여러 날 지나고 영혼은 마침내 강 앞에 섰다.


강은 흐르고 있었다. 영혼도 이미 알고 있었다. 영혼이 이미 알고 있었던 그대로 강은 흐르고 있었다. 영혼은 자신의 소원을 고백하기 위해 먼 길을 걸었다. 그러나 강 앞에 선 순간, 영혼은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두고 번민했다. 강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강의 표정을 읽은 영혼은 절망했다. 강은 머나먼 어제와, 먼 어제와, 어제의 어제처럼, 오늘도 변함없이 고백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강은 변함이 없었다. 영혼은 어째서 강이 그토록 수많은 인간들의 어두운 고백을 듣고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는가를 깨달았다. 강은 흐르고 있었다. 강은 그 모두, 즉 지금의 사막을 사는 사람들과, 영원에 가까운 먼 세월에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던 그대로, 흐르고 있었다. 단 한 방울의 빗물도, 단 한 방울의 땀도, 단 한 방울의 눈물도, 강에 닿는 순간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없었기에, 강은, 어제의 어제처럼, 어제의 먼 어제처럼, 그 머나먼 어제의 어제처럼, 오늘도 흐르고 있었기에, 강에 닿은 것은 무엇이든, 흘러가버렸다. 머무르지 못하고 흘러가야 했다. 영혼은 자신의 눈물이 강에 닿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그제야 겨우 깨닫고서 두려움에 떨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슬픔은 더욱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 슬픔이 강에 닿는 순간 사라져버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버린 영혼은, 강에 의지해 강에 자신의 슬픔을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혼은, 돌아서야 했다. 강을 등져야했다. 영혼은… 슬픔을 자기 안에 가둔 채로 남은 날수를 채우기로 결심했다. 영혼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눈물은, 강물처럼, 멈추지 않았다. 영혼은 강을 강의 자리에 그대로 둔 채 조용히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