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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라도 떴나 싶었다. 마당에 달린 등이었다. 저 등에 불이 들어온 것은 오늘 처음 보았다. 비 내리는 밤의 마당은 환했다. 은은한 빛 아래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아름다웠다. 젖은 파쇄석이 반짝반짝 빛났다. 마당의 화분들도 달빛에 젖은 듯 화사했다. 실컷 낮잠을 자고 이른 저녁에야 잠이 깨어 기지개를 켜는 아이의 얼굴처럼 싱싱하고 통통한 꽃과 이파리들. 노파는 저녁을 준비했다. 선장이 씻는 동안 나는 노파에게 오늘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위험했다면서?”

노파가 식탁에 앉는 선장을 향해 말했다.

“위험하기는요. 저는 나침반 없이도 어머니께 돌아오는 길은 찾을 수 있습니다.”

노파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저녁식사는 고기와 생선이었다. 생선이 무려 세 종류나 되었다. 아마도 선장의 배가 잡아오는 주 어종은 다 식탁에 오른 것 같았다. 샐러드는 찐 양배추와 삶은 브로콜리였다. 매일 비가 내리고, 매일 고기와 생선을 먹고, 매일 책을 읽는 일상이 이제는 자연스러웠다. 읽을 책도 생선만큼이나 풍족했다. 이렇게 편안하고 나른한 인생에 더 필요한 게 있으려나. 잘 익은 복숭아처럼 질감이 폭신폭신한 베개와 이불은 사랑하는 여인의 볼처럼 부드럽고, 탄력 있고, 향기로웠다. 작은 마당은 알뜰한 정원이어서 바라볼 때마다 마음을 편안하고 잠잠하게 만들어주었다. 이곳은 내 가족만 자리를 비운, 작은 천국이었다. 고향이 없는 내게 고향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집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덜어주었다. 이 집의 테두리 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식물처럼 여리고 연약했다. 그러므로 이 공간 안의 사람들은 무엇을 만지든 어떤 행동을 하든 조심스러웠고 차분했다. 이런 공간에서 오래 살 수 있다면 별로 죽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죽음. 사람이 날 때부터 유일하게 약속 받는 단 한 가지의 슬픔이자 선물. 나는 그것을 조금 미루고 싶어졌다. 고요함 속에서도 옅은 안개처럼 가느다란 바람처럼 움직이는 영혼의 온기. 이곳에는 바깥세상에는 흔치 않은 따스한 공기가 나직이 흘러 다니며 집에 머무는 자들의 영혼을 감싸주었다. 흐른다. 흘러 다닌다. 시냇물처럼, 아지랑이처럼, 파도처럼, 큰 파도처럼… 가득 찬다. 아침과, 밤과, 낮과, 식사시간, 책 읽는 시간 전부를 사랑할 수 있는 공간. 특별한 일 없이, 특별히 하는 일 없이, 하루가 가득 찬다. 이토록 무료한 일상을 사는 인생에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누구나 각자만의 천국을 가지고 있다면, 내 천국은 이곳이었다. 그러나 천국이라고 해서 지루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만히 누워있기가 지겨워진 나는 책을 집어 들었다. 몇 줄 읽지 않았는데도 이미 지루했다. 하지만 천국의 모든 책들이 지루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선장의 책방에서 몇 권의 책을 꺼내다두었다. 읽던 책을 내려놓고 파우스트를 들었다. 별. 쾌락. 욕망. 환상. 마법. 아물거리는 형상들. 삶. 미로. 메아리. 최초의 메아리. 영들의 세계. 사라진 것… 나는 파우스트를 읽으며 나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신비. 자유. 태고. 소리. 영혼. 고독. 침묵. 고요… 나는 침상을 정리하고 방에서 나와 노파의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의 가운데, 사막이 있는 곳에 노파가 앉아있었다. 노파는 책을 읽고 있었다. 노파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걸을 때와는 달리 구부정한 어깨. 두툼한 돋보기안경. 가느다란 팔. 마르고 쓸쓸한 어깨. 저 노파. 아니, 저 여인… 외롭지 않을까. 외롭지 않았을까. 저 여인도 나처럼 고아인데… 고아니까… 그녀도 아마 외로웠을 것이다. 그녀도 아마 외로울 것이다.


산의 숨소리. 초록의 산. 나무와 호수의 노래.

갈증. 고독. 뜨거운 태양.

고요한 파괴. 단절. 침묵.

영혼. 빛나는 영혼.

젖은 밤. 어둡고 기나긴 밤.

고향. 시들지 않는 슬픔.

생명. 삶. 미소. 죽음. 안식.

바람. 비. 바다.

외로운 아이….

Posted by 소설읽어주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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