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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증유의 대지

미증유의 대지 #41 . 뜨거운 영혼

*

나는 노파를 마주보고 앉았다. 노파의 자리 옆에는 작은 석유난로가 있었고, 난로 위에서는 주전자가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었다. 노파는 내게 차를 권했다. 낮고 따스한 공기가 내 주위에 가라앉았다. 불현듯 나는 노파에게 무언가를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깊이 숨겨두었던 일종의 작은 의무감이 고개를 쳐든 것이다. 그러나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싶었다. 물론 기회는 안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아니, 지금은, 미루고 싶었다. 달릴 준비가 되지 않은 말의 발굽에 미리 징을 박아둘 필요는 없는 것이다. 노파 역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침묵에 잠긴 채 유리그릇을 들여다보듯 나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풀과 흙의 냄새가 은은하게 실내를 흐르고 있었다. 늙은 노파의 손은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뒤덮여있었다. 검버섯으로 물든 피부는 노파의 삶이 안이 아니라 바깥세상에 둥지를 틀어왔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제는 생명의 심지가 줄어가는 늦가을의 나무 이파리처럼 시든 그녀의 거죽이었지만 그녀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아직 그녀의 몸 안에 불꽃이 살아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심지어는 책장을 넘기는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조차도 불길은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길은 작지만 지나치게 선명해서 그녀의 손에 들린 책이 불타오르지 않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녀가 품은 불길은 육신을 벗어난 살아있는 영혼을 닮아있었다. 거센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신의 불처럼 말이다. 그녀의 영혼은 뜨거웠다. 열기를 뿜어 눈을 멀게 하거나 손을 데이게 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그녀의 영혼은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늙어가는 것은 그녀의 육신뿐이었다. 작은 빗방울들이 온실의 천장을 두드렸다. 그것은 대지와의 만남을 고대하는 빗방울들의 여린 노크소리 같았다. 나는 비의 온도를 느끼고 싶어 마당으로 나갔다. 비는 차가웠다. 살갗에 곧 소름이 돋았다. 차가운 빗방울이 찻잔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잔잔한 바람이 마당에 잠시 머물렀다가 떠났다. 나무 이파리들이 촛불처럼 흔들렸다. 나는 가끔 나무를 보며 부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길이 필요 없는 존재들. 나는 걷지 않아도 되는 그들의 삶이 한없이 부러웠다. 걸어야 할 길도 없고, 걸어야 할 목적도 없는 인생. 나서, 자라고, 죽음을 맞이하고, 죽음 이후에 오는 고사목의 세월에도 걸어야 할 이유가 없는, 서있는 채로 시작되고, 서있는 채로 고스란히 마감되는 생. 걷지 않아도 되므로 길을 헤맬 필요가 없는 삶. 게다가 무엇보다도, 소리 내지 않는 고요한 삶, 고요한 죽음. 태어나서 단 한 발자국도 걷지 않고 죽음에 닿는 짐승이 존재할까? 그러므로 주어진 한 평 땅 위에서 삶과 죽음의 모든 생의 필연을 오로지 침묵과 수용으로 마무리하는 나무의 삶은 육중하고 엄숙하고 경이로웠다. 나는 온실로 돌아갔다. 노파는 여전히 독서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난로 위의 주전자를 들어 뜨거운 물을 한 컵 가득 따랐다. 온실의 분위기는 음악의 부재 속에서도 감미로웠다. 영혼은 불타고 있었으나 공기는 자유롭게 허공을 부유했다.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몸과 마음은 봄처럼 따스했다. 이 모든 포근함과 따스함이 저 늙고 작은 몸이 담고 있는 영혼의 체온으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따뜻한 공기가 주는 나른함에 젖어 잠든 채로도 흐르기를 멈추지 않는 시냇물처럼 마르지 않는 평화. 나는 노파가 지닌 신비로움을 느끼면서 다시 생각했다. 그녀는 왜 사막을 떠나야했을까? 그들에게도 이 영혼이 사랑스럽지 않았을까? 소중하지 않았을까? 그녀와 함께라면 대지를 불태우는 태양의 잔인한 열기도, 모든 걸 집어삼키는 모래폭풍의 포악함도 겨우 몇 페이지의 종이 안에 담긴 동화처럼 즐거운 에피소드이거나 미미한 고통이었을 뿐일 텐데…. 천장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악보 위에 받아 적을 수 있을 만큼 느린 템포로 바뀌었다. 노파는 읽던 책을 덮고 자리를 정리했다. 아무 일 없이 긴 시간이 흘러있었다.

“자, 이제 아침식사를 준비해볼까?”

노파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노파가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잠시 먼 수면 속의 산책을 다녀올 작정이었다. 따스하다고 느꼈던 온실은 실은 조금 추웠던 모양이다. 나는 포근한 이불 속에 몸을 쏙 집어넣고 어디에 다녀오면 좋을지를 궁리하다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어머니와 아내를 보았다. 둘은 어머니의 집 툇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의 내용이 궁금했지만 아무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태양이 떨어지고 있었다. 건너편 산 위로 붉은 노을이 깔렸다. 둘은 나란히 앉아 석양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은 편안해보였다. 곧 노을이 사라지고 밤이 내렸다. 아내는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타박타박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 소리는 유난히 가벼웠고, 뒷모습은 쓸쓸해보였다. 마당에 들어선 아내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집과 마당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너무 느린 몸짓이어서 혹시 필름이 늘어진 것 아닐까 하는 묘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아내는 그곳, 우리가 함께 살던 집 마당에 홀로 서있었다. 나는 더 이상 아내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마음이 답답했다. 아내는 어떤 얼굴빛, 어떤 표정으로 텅 빈 집을 바라보고 있을까…. 잠시 후 아침식사를 알리는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꿈을 정리하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앞에 앉았다. 아침식탁은 소박했다. 계란프라이 두 개와 양상추 샐러드, 그리고 브로콜리와 시금치를 넣은 스프가 식탁 위에 놓여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옛집에서 먹었던 어느 날의 아침식사를 떠올렸다. 사실 어느 날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매일 먹었던 아침식사와 비슷한 식단이었다. 어머니와 누이는 한식을 좋아했지만 특이하게도 아침식사만큼은 양식 풍으로 먹었다. 선장은 두 개의 프라이를 다 먹고, 두 개의 프라이를 더 먹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각자의 책을 들고 다시 식탁 앞으로 모였다. 우리가 식사를 즐기는 동안 옅은 구름 아래로 다시 먹구름이 깔렸다. 검은 구름들이 조각조각 모여들었고, 구름 조각들은 마치 촘촘한 그물처럼 조밀해지고 단단해졌다. 대기의 가장 높은 곳에서는 덩치 큰 바람들이 대이동을 준비하는 물소 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바구니를 들고 간식거리를 담으러 마당에 나갔던 노파가 선장을 불러냈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다음에는 선장이 나를 불러냈고, 잠시 후에 선장과 나는 집의 지붕 위에 올라가있었다. 지붕 위에서 바라보는 주택가의 풍경은 장관이었다. 시선의 끝에서 먹구름과 붉은색의 지평선이 만났다. 붉은색의 기와는 마치 잘 달구어진 쇳물 같았고, 먹구름은 부글부글 끓는 검은 기름 같았다. 우리는 지붕 곳곳에 놓인 모래주머니가 터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질긴 밧줄로 모래주머니들을 거미줄처럼 엮었다. 일을 마친 후, 나는 다시 붉은 지평선으로 눈길을 돌렸다. 땅을 집어삼킬 듯 이글거리는 먹구름보다는 새파란 하늘이 붉은 지평선과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지않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불과 연기와 비명소리가 난무하는 전쟁이 아니라 용암처럼 쏟아지는 빗물과 미친 바람과 가벼운 지붕과 연약한 인간들 사이의 무기 없는 전쟁이었다. 지붕에서 내려온 우리는 마당에 있는 화분을 모두 온실 안으로 옮겨두었다. 식물이 사라진 마당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 노파와 선장의 얼굴은 평온해보였다. 나 역시 그들처럼 평온해지려고 노력했다. 먹구름이 덩치를 불리고 있는 동안 바람이 선제공격을 해왔다. 지붕과 창이 덜컹거렸다. 우리 셋은 광풍의 소란을 음악 삼아 독서에 빠져들었다. 선장은 다른 종류의 사진 책을 꺼내왔는데 이번 것은 도시와 도시사람을 소재로 한 스냅사진들이었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출근을 하거나 퇴근을 하고, 쇼핑을 하고, 골목길을 걷고, 건물을 짓고, 거리와 식당에서 밥을 먹고, 밤거리를 배회했다. 노파의 손에는 온실에서 읽던 것이 아닌 다른 책이 들려있었다. 나는 괴테를 들고 왔다. 난로 위에서는 옥수수차가 끓고, 고구마가 익어가고 있었다. 북소리를 닮은 빗소리는 아주 먼 곳으로부터 울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북을 모아서 두들겨도 저 소리를 흉내 내기에는 부족할 것 같았다. 어른의 엄지손가락만큼 크고 무거운 수만 개의 빗방울들이 지붕을 때리는 소리는 거대하고, 촘촘하고, 현란했다. 자연의 소리가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신비의 음악, 호화로운 예술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마음이 들떠서 더는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식탁에서 일어나 거실 유리벽 앞에 앉았다. 빗방울이 온 세상을 촘촘히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지붕 위를 쳐다보았다. 빗물받이는 마치 범람하는 계곡 같았다. 바람은 하늘에서 땅을 향해 직각으로 떨어지며 마치 큰 북을 울리듯 쿵하고 땅을 때렸다. 어느새 우리 셋 모두 유리벽 앞에 앉았다. 우리는 멍하니 앉아 빗방울을 보고, 가끔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들었다. 나는 문득 이 작은 집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벽과 지붕에게 고마웠다. 아마 노파와 선장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단단한 벽과 지붕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떻게 이런 폭풍을 피할 수 있었을까? 집이 없었다면, 지붕이 없었다면, 우리는 진흙탕을 밟으며 방황하다가 감기와 동상에 걸려 얼어 죽었을 것이다. 빠른 박자로 떨어지는 무거운 비를 맞으며 몇날며칠을 헤매다가 온몸에 멍이 든 채 비참한 몰골로 죽었을 것이다. 바람은 수시로 마당에 떨어져 꽂혔고, 그때마다 집 안의 모든 유리들은 겁에 질린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상은 낮이라고도 할 수 없고, 밤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어둠에 휩싸여있었다. 아직 정오가 되려면 멀었는데도 세상은 낯선 밤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는 두꺼운 벽도 안정감을 잃었다. 사람들은 얇고 희미한 시멘트 껍질 안에 틀어박혀 불안에 떨고 있었다. 가끔 빗소리 사이로 기왓장이 날아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멍해진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을 때, 작은 새 한 마리가 마당으로 낙하했다. 제일 먼저 거실 문을 열고 새를 구해온 것은 노파였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아 주택가를 배회하다가 떨어지는 바람덩어리에 맞은 모양이었다. 참새였다. 숨이 붙어있었다. 노파는 난로 옆에 수건을 깔고 그 위에 새를 누였다. 잔인한 폭풍우의 공연은 다행히도 사흘 만에 막을 내렸다. 참새도 기운을 차리고 일어났다. 그러나 날개 뼈를 다쳤는지 날지 못했다. 노파는 참새를 마당에서 키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