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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불면인

불면인 #13 . 동굴 . 꿈-비행


동굴

새벽의 찬란하던 태양은 늦은 오후의 먹구름에 가려 힘을 잃었다. 나는 조금 멀지만 눈과 비를 피할 수 있는 굴다리로 자리를 옮겼다. 눈을 피하기엔 좋은 곳이지만 바람은 거리보다 두세 배 더 강렬해지는 곳, 이빨 빠진 톱날처럼 거친 바람이 부는 곳이다. 그리 자주 찾는 곳은 아니지만 다행히도 오늘은 구름만 자욱할 뿐 바람은 고이 잠들어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애완견을 끌고 가는 사람, 장바구니를 든 나이든 여자들이 수시로 옆을 지나친다.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음식, 혹은 사람과 짐승은 일정한 온도에서 서로 만났을 때,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욱 친밀한 따스함을 느낀다. 누군가는 식은 국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입술과 식도를 지나 내장까지 익힐 만큼 뜨거운 국물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차가운 살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따스한 살을 좋아하는 것처럼 각자의 온도를 유지해가며 생존하는 모든 생명들에게 자신에게 가까운 온도라는 것은 곧 인연의 매개가 되기도 하고 인연을 마감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개를 끌고 가는, 혹은 개에게 끌려가는, 여위었지만 몸매 좋은 노파는 몸뚱이도 차갑고 마음도 차가워 보인다. 그 노파의 속 깊은 심정은 자신이 죽어도 개가 더 오래 살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외로우니까. 개보다 자신이 더 외롭다고 믿으니까. 마른 살 위에 가죽만 남은 노파의 몸이 가진 온도는 내가 가진 몸의 온도와 비슷하리라 예상되지만 서로 어울릴만한 체온은 아니다. 노파는 곧 집에 돌아가 몸을 녹일 수 있고, 나는 이대로 얼어있어야 하므로. 노파가 끌고 가는 개를 보면서 나는 식욕을 잃었다. 그 주인의 그 개. 체온을 유지할만한 살도 거죽도 잔뜩 말라있다. 그래, 덜 외롭다면. 덜 외로울 수 있다면 개와 체온을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주인과 짐승이 서로 닮은꼴이라는 건 왠지 서글프다.

찬바람이 분다. 뒤집어쓰고 있던 신문지가 날아간다. 다행히 깔고 누운 박스는 날아가지 않는다. 몸뚱이도 날아가지 않는다. 가볍지만 박스를 잃어버릴 만큼 가볍지 않은 몸무게에 고맙다. 하지만 밤은 변함없이 길고 오늘밤도 다르지 않다. 바람은 굴다리의 길이보다 서너 배는 더 길게, 더 오래 분다. 때로는 맞은편 벽을 따라 흐르고, 때로는 내가 누운 쪽 벽을 훑고, 때로는 천장을 긁고 지나간다. 마치 피리의 몸통을 흐르는 공기처럼 쉬잉 쉬잉~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인간의 보행을 위해 뚫어놓은 콘크리트 구멍 속을 관통하는 바람소리는 마치 작곡가의 가파른 심장을 드러내는 피날레처럼 거칠고 웅장하다. 바람이 훑고 간 내 몸에도 그 거친 소리의 흔적이 남는다. 끊어진 현처럼 갈라지는 머리카락. 한쪽으로 쏠리는 옷의 보푸라기들. 이미 찢어진 옷깃 사이로 날아오를 듯 휘날리는 실밥자락들. 내가 누운 곳은 땅인가, 허공인가? 억지로 잠을 청해보지만 절벽에 매달린 기분으로는 잠들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살을 뚫고 들어온 추위가 뼛속을 두드릴 무렵이 되면 몸이 조금씩 무감각해지고 곧 잠이 온다.




꿈 | 비행

나는 가끔, 그러나 주기적으로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처음에는 겨우 허공에 뜨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비행이 가능해졌다.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높이 날아보겠다는 욕심을 품거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면,

허공에 살짝 떠오르는 간단한 공중부양도 힘들었다.

숱하게 비행을 시도했다.

어떤 날에는 벌새처럼 자유롭게 나는가 하면,

어떤 날에는 전신주 높이를 겨우 오를 때도 있었다.

나는 쫓기고 있었다.

비행을 꿈꾸는 날에는 하늘을 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나뿐이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비행의 꿈 최초로 나 외에 하늘을 나는 것이 가능한 자들을 만난 것이다.

스무 명에 가까운 인원이었다.

그들이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처럼 긴 훈련에 의해 비행이 가능해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비행은 비행이라기보다는 점프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랫동안 훈련한 탓인지 일사분란하게 사람을 추격할 줄 알았다.

그들의 점프력은 놀라웠다.

육칠 층 높이의 건물을 뛰어오르는 데 채 이삼 초가 걸리지 않았다.

마음을 잘 다스려야 자유로운 비행이 가능한데,

마음을 편안하게 다스리기에는 추격의 압박이 심했다.

멀어야 겨우 오십 미터 정도로 벌어질 뿐이었다.

팀의 지휘자는 옅은 갈색머리의 여자였다.

가느다랗게 흘러내리는 연한 머릿결로 보아 태생적으로 멜라닌 색소가 부족한 모양이었다.

유난히 하얀 얼굴이다.

그녀는 자신의 스피드나 순발력이 다른 대원들에 비해 월등함에도 불구하고,

선두에서 나를 쫓지 않고 대열의 중앙에서 대원들을 지휘했다.

어쩌면 나를 잡는 일은 일종의 훈련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꼭 잡아야만 했다면,

그녀는 이미 서너 번 이상 나와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그 정도 거리라면 어떤 무기를 써서든 나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이 상황이 만약 훈련이라면 어딘가에 나와 비슷한,

혹은 나보다 더 잘 나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이고,

나는 실험용 쥐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나는 더더욱 잡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를 쥐 정도로 취급하다니…

아무리 별 볼일 없고, 거리에 사는 노숙자라 하더라도 나는 노상방뇨조차 꺼리는,

나름대로 세상에 최소한의 피해를 끼치려고 노력하는 선한 사람인데 말이다.

대열의 선두와 나는 여전히 50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과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벽이나 바닥에 몸을 붙이고 있고, 나는 허공에 떠있다는 것뿐.

선두의 첫줄에 선 남자의 핏발 선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나는 ‘보호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을 노리는 새떼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바다색과 같은 푸른색 등을 갖고,

수면 아래 천적들의 눈을 피해갈 수 있는 흰 배로 몸을 두른 채,

푸른 해수면을 자유로이 유영하는 고등어처럼,

내 몸의 배경과 같은 색으로 변하는 피부를 입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지어 빛 아래에서는 빛이 되고,

그늘 속에서는 그림자가 되는.

더 나아가 더럽고 싶은 날에는 담배꽁초나 음식쓰레기가 되고,

반짝이고 싶은 날에는 촘촘하게 바느질된 핸드백이나 빛나는 구두가 될 수 있다면.

그러나 바라는 소원이 무엇이더라도 입김으로 바람을 막을 수는 없는 법.

나는 겨우 꿈에서조차도 쫓기는 신세에 불과한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더럽고 싶은 날이었나 보다.

나는 쫓기는 와중에도 부글거리는 소장과 대장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설사기운을 느꼈고,

부리나케 화장실을 찾아내야만 했다.

나는 우선 3, 4층 높이의 빌딩들이 즐비한 작은 빌딩숲으로 몸을 날렸다.

나를 가까이서 쫓고 있는 추격자들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다.

나는 미로를 더듬듯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숲 사이를 방황하는 척하다가,

네다섯 코너에서 급하게 직각 비행을 하며 놈들을 따돌렸다.

이제 내 시야 안으로 들락날락거리는 미행은 두 놈으로 줄었다.

창이 열린 빌딩을 찾아야 했다.

나는 반 블록쯤 되는 거리의 회색빌딩 3층의 창이 밖으로 열린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직선으로 날아간다면 금세 놈들에게 발각될 것이 뻔했다.

나는 우측으로 한 번, 좌측으로 한 번,

다시 좌측으로 한 번, 우측으로 한 번,

우측으로 한 번, 좌측으로 한 번,

그리고 마지막 턴을 마치자마자 잽싸게 주변을 돌아본 후,

열린 창문 틈으로 빨려들듯 몸을 숨겼다.

행여나 내가 창문으로 들어간 것을 본 놈이 있을지도 모르니,

3층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생각이었다.

나는 곧 터지기라도 할 듯 부푼 배를 양손으로 거머쥐고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한 층 정도의 차이라면 발각될까 싶어 1층까지 내려갔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1층 로비로 이어져야 할 비상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계단에서 밖으로 연결된 문이 밖에서 잠기다니.

이 빌딩에 불이나면 계단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모두 1층 비상구 앞에서 질식사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2층으로 다시 뛰어 올라가 화장실을 찾자마자,

벽 쪽에 붙은 제일 마지막 칸으로 들어가 급하게 엉덩이를 까고 앉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돌덩이가 둥근 엉덩이 살을 감쌌다.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의 차가움이었지만,

꾹 참고 신음을 흘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 와중에 놈들이 내가 숨은 곳을 찾아낸다면,

어쩌면 나는 똥을 지리면서 하늘을 날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될 것이고,

똥을 싸면서 하늘을 날아본 적이 없는 나는,

똥을 싸면서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스릴 자신이 없었다.

나는 놀란 엉덩이를 추켜세우고, 변기 뚜껑을 내린 후 다시 일을 보기 시작했다.

나일 강처럼 육중하고 도도하게 한 줄로 줄줄 흘러내리는 설사는,

엉덩이 이곳저곳에 똥물을 튀겼다.

그러나…….

더러운 기분이지만 행복하다.

추격자를 따돌려야 하는 고단함과,

몸을 적신 땀방울들이 무색하게도, 찰나 같은 한 순간에 행복이 덮친다.

오직 살아서,

먹고 싸는 세월 동안만 느낄 수 있는 배설의 쾌감.

긴 추격에 시달리고 내 몸뚱이 부피만큼의 땀을 흘리고 난 직후에,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상황에서 맛보는 배설의 즐거움은,

세상 모든 배설의 쾌락 중의 백미다.

추격자들과 나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나는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적어도 쫓기지는 않을 테니까?

글쎄….

그런 일이 가능하다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의 것과 내 것을 바꾸고 싶지도,

공유하고 싶지도 않다.

날지 못한들 어떠하겠는가?

자유롭기만 하면 되는 것을.

변보는 일을 어느 정도 마치고 나니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화장실 오른쪽으로 난 작은 창으로 멀리 구멍가게가 하나 보인다.

번화한 빌딩숲 뒤편의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골목이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지나치게 낡고 오래된 구멍가게다.

이 추위에도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미닫이문이 살짝 열린 것을 보니,

손님이 꽤 드는 모양이다.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의 따뜻한 마음씨가 엿보인다.

나이 든 안주인은 특이하게도 앞치마를 걸치고 있다.

반찬코너라도 겸하고 있는 것일까?

안주인과 바깥주인이 교대로 나와 골목을 살펴본다.

그러다가 드디어 사건이 터진다.

작고 검은 물체 하나가 가게에서 툭 튀어나오더니 골목 위를 냅다 달린다.

그 뒤를 바깥주인이 쫓는다.

골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쥐의 모습이 마치,

내 살갗과 묵은 옷 사이에 자리 잡은 벼룩들 같다.

내가 잠들 때마다 깨어나 몸 구석구석을 배회하는 벼룩들.

매일 내 몸을 괴롭히지만 나는 그들을 추격하지 않는다.

오히려 덩치 큰 짐승에게 쫓기는 쥐의 꼴이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들의 추격전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난다.

멀미는 탈것의 움직임과 멀미하는 자의 내장의 움직임이 상이한 상태에서

탈것이 풍기는 탈것의 구석구석에 배어있는 냄새와,

함께 동승한 자들의 숨 냄새와 몸 냄새가 모두 어우러져

정신을 혼미하게 하며 구토와 어지럼증을 동반하는 증세이다.

어지러운 추격전을 관람하고 있던 중에,

가게 옆 골목에서 나이 든 노인 하나가 슬금슬금 나타나더니 가게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

때마침 2층에서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반바지와 민소매 차림의 젊은 여자가 내려온다.

여자는 전혀 추워 보이지 않는다.

노인의 시선이 여자 쪽으로 움직이지만 안 보는 척 애쓰는 흔적이 역력하다.

여자는 가벼운 걸음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가게 위층에 세를 사는 사람이거나 가게 주인의 딸일 것이다.

노인은 여전히 안 보는 척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느린 발걸음이 더욱 느려진다.

이것저것 물건을 집어 들고 나온 여자가 다시 2층으로 올라간다.

사라져버린 여자의 꽁무니를 쫓으며 노인은 우왕좌왕하고 있다.

중풍기운이 있는 듯 접힌 한쪽 팔을 가볍게 떤다.

노인과 여자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사이,

쥐는 결국 남자의 발에 밟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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