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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불면인

불면인 #15 . 꿈-전령 . 구두


꿈 | 전령

새였다.

머리는 검게 빛나고,

날개는 옅은 하늘색.

새의 고도는 아마도 대기권의 바로 아래에 머물러있었을 것이다.

덩치는 거대했지만, 비행하는 모습은 마치 검은 점이 허공을 떠다니는 것 같아 보였다.

새는 마치 하늘 전체가 자신의 놀이터인양 크고 느리게 비행을 즐겼다.

낯선 생김새와,

낯선 색과,

낯선 몸집을 가졌지만,

새의 특이한 색과 큰 깃털은 어딘지 모르게 행운의 기운을 뿜고 있었다.

긴 비행을 마치고나면 새는 평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넓은 초원 위를 두 발로 총총 뛰며 산책을 즐기다가,

산책이 지루해지면 단 세 번의 날갯짓으로

화살이 날 듯 긴 사선을 그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사냥을 위한 비행이 아니었다. 새에게 비행은 그저 놀이였다.

하늘이라는 거대한 놀이터를 여유 있게 날 때와는 달리,

땅위에서의 걸음걸이는 몹시 방정맞아 보였다.

아마도 들판에 남은 나락으로 속을 채우기 위해 착륙하는 것이었겠지만,

저 정도의 식사로 저 큰 몸집을 유지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한 번도 새가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새의 눈동자는 거울처럼 맑았고,

초점은 칼끝처럼 또렷했다.


새는 날아오를 때와는 달리 긴 포물선을 그리며 땅위에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곧.

봄이 오겠구나, 생각했다.


가녀린 태양.

찬란한 빛.

연하고 부드러운 바람.

눈부신 녹음.

춤추는 아지랑이.

새는 봄을 닮아있었다.


태양은 눈의 결정처럼 잘게 쪼개진 채 뜨거움을 잃어버렸지만,

대기를 떠도는 공기는 이미 빙하기의 그것이 아니었다.

육각형으로 살을 가르고,

그 가름 사이로 냉기를 불어넣는 겨울의 사신이 아니었다.

포근했다.

따스했다.


짧은 꿈이었다.




봄이 온다. 라… 행복한 꿈이다. 졸음에서 깨어난 내 몸은 연골까지 얼어붙어 관절이 펴지지도 접히지도 않는 무관절 목각인형이 되어있다.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봄만 와준다면. 봄 햇살의 따스함에 몸을 녹일 수 있다면. 한번만 더 봄이 와준다면, 올겨울과는 다르게 다음 겨울을 맞을 준비를 착실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선과 소음으로부터 방해받지 않을 공간을 찾고, 종이박스보다 튼튼한 집을 짓고, 겨울을 나게 해줄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책을 읽을 조명과, 불을 때서 몸을 데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단지 희망일까? 불가능할까? 하지만 누구나 다음 기회라는 게 찾아와준다면 모든 것이 가능할 거라는 희망을 가진다. 희망이라기보다는 집착이거나 맹신이다. 하지만 믿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믿어진다. 이 정도는 믿고 살아야 그나마 생존을 유지할 수 있다.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봄은 반드시 오지 않는가. 그러나 결국 나는… 변함없이 겨울이 두렵다.




구두

하루를 반으로 나눠 살겠다는 생각은 어디에 뿌리를 둔 걸까?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반은 잠이나 혹은 꿈으로, 나머지 반은 현실로. 반은 낮으로, 반은 밤으로. 사실 내게는 더 긴 잠이 필요했지만 그나마 반으로 나눠서라도 하루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하지만 몸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정확히 6시간을 잔 후 6시간 동안 깨어있었고, 다시 6시간을 잠든 후 6시간을 깨어있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다른 이들의 이틀처럼 살았다. 두 조각으로 쪼개진 하루의 수면은 수면이라기보다는 외면에 가까웠다. 그리고 충분히 부족한 휴식이었다. 길 위에서의 잠은 꿈으로 가득했다. 꿈으로 채워진 수면은 늘 현실보다, 혹은 현실만큼, 고단했다. 남들이 사는 하루가 내겐 이틀이었으므로 내 나이는 이미 환갑을 넘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고단한 것이 당연하다. 답이 하나뿐인 단답형 시험문제를 나 혼자 맞춘 꼴이었다. 다른 이들의 외면과 그들에 대한 나의 외면이 마주보고 섰다. 당연히 고독은 내 살과 뼈가 되었다. 비에 젖은 나뭇잎과 꽃잎들이 흘리는 눈물처럼, 나는 고독하고 또 고단했다. 하지만 다행이다. 현재의 멈추지 않는 고독과 고단함을 깨닫고 난 후의 삶이, 길어도 백년을 넘을 수 없으니. 모두에게 하루 두 번의 낮과 두 번의 밤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조금 더 오래 행복할 수 있을까? 긴 하루를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저주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나는 하루에 두 번이나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을 즐길 수 있었다. 오전의 사람들은 건조했고, 저녁의 사람들은 쇳물처럼 녹아있었다. 나는 사람들의 얼굴색과 표정에서 세상을 읽을 수 있었다. 갓 깨진 돌처럼 차갑고, 단단하고, 거친 세상. 용광로처럼 뜨겁고, 지옥의 사신처럼 몰인정한 세상. 나는 유독 눈에 띠는 한 아이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당연히 나는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그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장소만 지킨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 아이를 보는 짧은 순간이 지난 후, 긴 몽상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작은 행복이라는 것 중에는 이런 종류의 것도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그 아이를 발견한 첫날, 아이의 손에는 구두가 들려있었다. 봉투나 가방에 넣지 않고 구두 배달꾼처럼 한 손으로 한 켤레의 구두를 그러쥔 채였다. 구두의 모양은 종종 바뀌었다. 아이는 늘 골목 끝에서 나타났다. 골목 끝 즈음에 사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골목을 거쳐 이 골목으로 들어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이를 처음 만났던 날에는 눈이 내렸다. 몇 미터 앞의 간판도 읽을 수 없을 만큼의 폭설이었다. 광풍 없는 고요한 폭설이었다. 골목의 끝에 검은 점이 하나 나타났다. 점은 가물거리며 움직이더니 이내 조금씩 커져 삽시간에 조랑말 크기만 한 아이가 되었다. 나는 닫힌 철공소 셔터에 등을 기댄 채 하늘과 길의 풍경을 게으른 시선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겨울 내내 하늘에 쌓인 눈이 한 번에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나는 아이의 희미한 그림자를 기억한다. 내 발등을 감싸고 지나갔지만 체온이 전해지지 않는 옅고 흐린 그림자. 먼 그림자의 끝, 아이의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실은 걸음걸이가 아니라 그림자의 기울어짐이 이상했다고 해야 할까? 한쪽 다리가 살짝 짧고 심지어는 발 크기도 짝짝이였다. 나는 내리는 눈을 혀로 녹여가며 목을 축였다. 아이의 눈동자가 나를 슬그머니 밟고 지나갈 즈음 나는 잽싸게 시선을 가로채 아이에게 물었다. “왜 구두가 짝짝이지?” 아이는 차분한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놀란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아이의 손에 들린 구두 두 짝이 바람에 흔들리듯 가볍게 진자운동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말을 꺼낼 것처럼 아이의 입술이 우물거리다가 멈췄다. 마치 입을 다문 채로 소리를 전해야 할 때 느끼는 답답함 같은 것이 전해졌다. 그러나 아이는 잘 참고 있었다. 철공소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은 무엇이라도 파고들어 구멍을 내버리겠다는 듯 뾰족하게 날이 서있었다. 저 송곳이 무른 물방울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눈 내리는 날에 흐르는 침묵의 소리는 다른 어느 날보다 더 무거웠다. 아이의 눈과 내 눈은 오랫동안 닿아 있었다. 아이의 눈동자답게 검은자위와 흰 자위의 경계가 선명했다. 쌍꺼풀 없는 눈. 바라보는 행위만으로도 무엇이든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처럼 맑았다. 아이의 눈에 내 눈동자는 어때 보였을까. 내 몰골은 어때 보였을까. 눈은 그야말로 한없이 쏟아져 내렸다. 한 알의 드러누운 눈 위에 다음에 떨어져 내린 한 알갱이의 눈이 꽂히고 그 다음 알갱이가 아래의 알갱이들 위를 덮기를 반복했다. 세상은 백색이고, 나는 죽어봐야 들짐승 아니면 먹어줄 고기도 못되는 존재. 구두는 짝짝이였고, 나는 무가치했다. 존재에 값을 매길 수 있다면 누가 내 고기의 값을 잡고 마진을 정할 것인가. 값을 치르고 내 고기를 떼어갈 자는 과연 있을 것인가. 어쩌면 오늘 같은 날에는 고기를 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조금 더 값을 쳐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겐 죽음의 자유조차 없다. 겨우내 추위 속을 동태처럼 나뒹굴어도 아무도 내 영혼이나 고기를 사가지 않는다. 팔리지 않는 인생. 눈은 이제 하늘에서 내리는지 땅에서 피어오르는지조차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골목 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짝짝이 구두를 살랑살랑 흔들며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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